[사설]정치권의 잘못된 개입

  • 입력 1998년 8월 23일 19시 07분


산업현장의 노사분규는 기본적으로 당사자간의 원만한 대화를 통해 법테두리 안에서 해결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것이 불가능할 때 외부의 중재가 한정적으로 요구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개입이 지나쳐 원칙을 무시하는 결과가 나오면 곤란하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자동차 분규와 관련해 경제 5단체가 정치권의 지나친 개입을 비판하고 나선 것을 정부와 정치권은 주목해야 한다.

현대자동차 사태는 회사측의 정리해고 추진과정에서 비롯됐다. 정리해고는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 경제위기를 극복한다는 취지로 노사정(勞使政)위원회의 합의를 거쳐 입법화한 사항이다. 그러나 대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정리해고의 시험대에 오른 현대자동차의 경우 협상의 주체는 노사정이 아닌 노사당(勞使黨)의 모습으로 변했다. 정치인들이 협상과정에 깊이 개입해 법과 원칙이 퇴색하고 정치성 강한 흥정이 부각되고 말았다. 이런 식이라면 정리해고법은 사실상 사문화된다.

파국을 막겠다는 열정 때문에 개입했다면 분규현장의 정치인들이 유념했어야 할 것은 균형감각이다. 사태 해결에 집착한 나머지 어느 한쪽에 무원칙한 양보를 강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정치권의 개입으로 사용자측이 일방적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결과가 나온다면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세계의 이목은 우리의 노사현실에 크게 실망할 것이다. 경제를 경제논리로 풀지 않고 정치논리로 대응할 때의 폐해를 우리는 무수히 보아왔다. 입법당사자들이 불법파업에 대한 엄정한 법집행 대신 파업과정에서 사법당국에 고소고발되어 있는 사안까지 흥정거리로 삼는다면 이 또한 경제논리를 압도하는 정치적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정치적 협상이 법질서를 교란해서는 안된다.

어린이들을 농성장에 데리고 나온 어른들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다. 경찰 투입에 대비한 것이라지만 어린이들은 모든 재난으로부터 최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대상이다. 하물며 어린이들을 유모차에까지 태워 경찰의 진압장비와 대치하고 있는 농성장에 이끌고 나오는 것은 어른들의 수치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린이를 볼모로 삼는 일은 동정받지 못한다. 내일의 주인공들의 뇌리에 무법 무질서의 모습이 각인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현대자동차 사태는 타결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떤 과정과 방식에 의해 해결되느냐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원만한 미봉보다는 원칙에 따른 확실한 타결만이 환란극복의 필수요건인 구조조정의 큰 숙제를 풀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당사자간 타협이나 법적 중재권자의 조정이 아닌 정치권의 과잉개입은 설혹 협상타결을 이끌어 낸다 해도 그같은 악선례를 이용하려는 더 많은 분규를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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