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에게는 오래전부터 ‘공(恐)러 의식’이라 하여 러시아를 경계하는 정서가 있어 왔다. 공러 의식은 멀리 1860년 청나라가 제정러시아의 압력으로 연해주를 내준 때로부터 구소련이 공산권의 종주국 노릇을 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1985년 젊은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면서 결국 구소련은 무너졌다. 15개 공화국이 모두 독립하고 러시아도 독립했다. 매년 6월12일은 러시아 독립기념일이다. 93년 옐친 대통령이 서명해 세계에 선포한 ‘러시아 신군사독트린’은 러시아를 적대하지 않는 세계 모든 나라가 러시아의 우방이라고 천명하였다.
러시아는 새로 태어났다. 이제 서울 상공에는 수호이 전투기가 날고 동대문시장과 부산항에는 러시아 행상들이 붐비고 있다. 9월 말이면 수교 8주년을 맞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러시아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은 아직까지 그리 긍정적인 것 같지 않다. 남의 빚 쓰고 갚지 않는 나라, 마피아와 범죄가 날뛰는 나라,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러시아를 며칠 다녀온 사람들이 단편적으로 퍼뜨리는 이야기들이 그런 의식을 부채질하는 것 같다. 그러나 러시아를 가볍게 보는 것은 단견이다.
러시아는 선진국이다. 로마노프왕조의 아름다운 건축과 미술, 푸슈킨 톨스토이의 문학과 차이코프스키의 음악, 볼쇼이 발레가 있는 문화예술의 선진국이며 세계 유일의 유인 우주정거장 미르를 쏘아올린 과학기술의 선진국이다. 또한 지구 북반구의 반을 차지하는 광대한 영토엔 석유 천연가스 산림자원이 무진장한 자원 부국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한국은 산업근대화 과정에서 외국 기술을 도입하는데 막대한 투자를 했지만 아직도 필요한 하이테크를 돈 주고도 못사는 분야가 많다. 특히 항공 우주산업 분야와 국방산업 분야가 그렇다. 러시아는 이 분야에서 우리에게 문을 넓게 열고 있다.
중동보다 훨씬 가까운 시베리아와 극동에는 풍부한 에너지 자원이 있다. 연해주지방의 산림과 오호츠크의 수산자원은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준다. 오랜 사회주의 경제의 핍박으로 메말랐던 러시아는 우리 경공업 제품의 최대 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정치 외교 안보적으로도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서는 러시아와 가까워야 한다. 한반도의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들을 소외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주변 강대국들중 진정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바라는 나라가 있다면 바로 러시아다. 그들이 제의한 동북아 다자회의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한반도 통일에 러시아가 한몫 하도록 해야 한다.
러시아 사람들은 선량하고 소탈하며 밝고 명랑하다. 친구간의 의리를 지키고 도움을 받으면 고마워할 줄 알며 반드시 갚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빚이자 받을 날짜만을 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러시아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선린 우방으로 맞아야 할 이웃나라이며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기회의 땅이다.
최영하<주 우즈베크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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