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31)

  • 입력 1998년 8월 23일 19시 53분


제2장 달의 잠행⑦

나는 단념하는 기분으로 얇은 여름천의 흰색 스커트를 펴 들고 산딸기를 받았다. 그의 손등에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세 개나 있는 것이 보였다. 불량한 자국. 나의 눈가에 짧은 경련이 일어났다.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그는 산딸기를 나의 스커트에 쏟은 다음 다시 계곡 아랫길로 한발 내려섰다. 나는 치마를 든 채로 그의 앞을 지나 아랫집 땅인 소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무덤이 있고 무덤가에는 소나무들이 둘러 서 있어 그늘을 이룬데다가 곁에는 작은 연못도 있었다. 그리고 아래 계곡과 계곡 가의 가파른 계단식 논들도 내려다 보였다. 새하얀 스커트에 벌써 농익은 산딸기 물이 배고 있었다. 나는 급히 산딸기를 입에 넣었다. 뜨겁고 시고 달고 알갱이는 이물질처럼 단단해서 잘 씹히지 않았다. 돌아보니 그가 자신의 땅을 밟으며 오르고 있다가 문득 내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흰색 스커트에 핏방울 같은 붉은 물이 점점이 배어들고 있었다.

오후에 수를 데리러 가려고 밖으로 나가니 이제 막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비가 오나, 하며 열쇠를 쥔 손을 허공에 펴고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자동차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언덕길을 내다보니 우체국장이 활짝 열린 차창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려오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눈을 몇번 깜박거렸다.

6월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다만 6월이 되자 개망초꽃이 일제히 피어 언덕길이 하얗게 뒤덮였다. 그리고 마을의 집들엔 접시꽃들이 층층이 피어났다. 붉고 희고 분홍색인 접시꽃들은 순박하고도 화려했다. 산딸기는 너무 익어서 검게 짓물러 더 이상 따 먹을 수가 없었다. 언덕길을 혼자 산책할 때나 애선의 집을 다녀 올 때, 혹은 숲길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나 산딸기를 따고 있을 때, 윗집 남자의 차가 지나가는 것을 이따금 보았다. 나는 그와 어느 정도 관계를 유지해야 할지를 몰라 어느 때는 단순한 이웃처럼 인사를 까딱하고 또 어느 때는 전혀 모르는 낯선 사이처럼 쌀쌀하게 지나쳤다.

호경은 너무 많은 시간 동안 일을 했다. 아침 아홉 시경에 수와 함께 나가 밤 열두 시에야 돌아왔다. 점원을 더 구하고 자리가 잡혀야 출근시간과 퇴근시간 중 얼마간을 자기 시간으로 빼낼 수가 있을 거라고 했다. 그는 새로 시작한 일에 긴장한 듯 보였다. 그런데도 서점에선 아직 이익이 생기지 않았다. 하긴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일을 그만 두고 쉬었던 기간까지 합하면 거의 열달 동안 계속 우리 가계엔 수입이 없었다. 생필품과 반찬 같은 것은 그가 사 날랐고 집 관리도 그가 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생활비가 없는 점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7월이 되자 장마가 시작될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아직은 맑고 뜨거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햇볕이 불붙은 담요처럼 공중에 떠있었다. 나는 자동차 창문을 고치러 갈 생각을 했다. 자동인 창문은 내려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아서 그대로 장마를 맞으면 차안에서 첨벙거리며 물장난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중고차는 고치는 돈이 더 든다더니, 이제 시작인 것 같았다.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거울 앞에 앉아 오랜만에 화장을 했다. 마치 여행중인 여자처럼 가방에서 천으로 된 화장품 가방을 꺼내 콤팩트 속의 작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눈 화장을 하고 눈썹과 입술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스카라를 듬뿍 칠했다.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화장을 하고 있으니, 어쩐지 퇴폐적이고 정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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