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명이 배불리 먹으면 10만원 가까이 나오는 패밀리레스토랑. ‘그래도 1인당 3만원 정도면 되니까’ 월 1회 이런 데서 모이는 게 별 부담은 안됐다. IMF체제 전까지는. 맞벌이하는 김혜숙씨(28·고등기술연구원 대리)는 그래서 5월부터 동료 2명과 함께 ‘먹자계’로 모임의 방법을 바꿨다. 각자 매달 1만원씩 내 9만∼12만원을 모아 서너달에 한번씩 레스토랑이나 뷔페에서 ‘배에 기름 치자’는 취지. 최근 힐튼호텔 뷔페에서 첫 모임을 가진 김씨. “횟수를 줄여서라도 원없이 먹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모임 횟수를 줄이고 나서 그동안 ‘너무 썼다’는 후회도 한다.”
▼ 재테크?계테크? ▼
친한 사람끼리 매달 일정액을 모아 순번대로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모임. 일종의 ‘무담보 신용대출’인 계(契)는 혼수나 집장만 등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재테크 수단이었다. 호황이던 95년, 사채와 더불어 국내 총 저축액의 13.3%를 차지할 정도(한국은행 집계)로 인기였으나 최근 개인 수입과 지출이 신용도와 함께 추락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추세. 대신 만원 단위의 ‘작은계’가 목돈이 오가는데 따른 위험을 없애고 친목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각박해지는 세정도 반영.
▼ 돌 하나로 새 두마리 ▼
‘효도계’를 하는 주부 김연진씨(35). 4형제자매가 각자 월 5만원씩 내어 적립했다가 설 추석 부모님 생신 등 4차례 시골에 내려가면서 칠순의 부모님께 60만원씩 용돈을 드린다. “부모님이 ‘현찰’을 선호하시는 것 같아 선물대신 용돈을 드리고 있다.” 과거 형제가 같은 선물을 사가 난감해 한 적도 있었고 용돈을 각자 드리자니 서로 눈치가 보여 불편했는데 효도계가 모든 고민을 털어줬다고.
3년짜리 여행계에 든 주부 박소라씨(29). “직장생활로 모은 돈으로 해외여행을 가려고 별렀는데 IMF시대 탓에 ‘꽝’됐다. 매달 3만원씩 친구 3명과 모은 돈으로 3년 뒤에는 꼭 구름을 위에서 내려다 보겠다.” 남편과 친구들이 항공사에 다니는 ‘비행가족’이라 항공료할인혜택도.
서울 언남고 출신 주부 5명과 ‘비(非)주부’ 3명의 ‘결혼계’. 매달 1만원씩 적립해 청접장을 갖고 오는 사람에게 30만원씩 주는 이 모임에는 요즘 긴장감이 감돈다. 비주부들이 독신에 적응하는 조짐을 보여 이미 곗돈을 탄 곗군 사이에 ‘돈을 썩히느니 놀러가자’는 의견이고개를 들고있는것. “무슨 소리!” 곗돈을 떼일(?) 위기에 처한 오은정씨(28·한미은행)등 비주부들은 “곗돈을 기어이 타고야 말겠다”고 비장한 각오.
돈도 돈이지만 ‘작은계’의 주인공들이 무엇보다 중시하는 것은 ‘만남’. 박소라씨. “바쁜 생활에 계라는 연결고리마저 없으면 1년에 한번 만나기도 어렵게 된다.”삼보컴퓨터 95년 입사동기 7명의 모임 ‘구로(95)동’ 멤버로 생일계를 하는 김선주씨(28)도 “바빠서 모일 기회가 없다.생일에 돈을 모아 선물하는 계모임마저 없으면 동기 이름도 까먹을 판”이라고.
▼ IMF시대에 심은 핵폭탄 ▼
신한은행 재테크상담실 서성호과장의 생각. “고도산업사회는 불신사회다. 10∼20명의 계원 중 단 한명이라도 약속을 어기면 깨지게 마련인 계가 성공했던 과거 한국이 오히려 고도의 신용사회였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지출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산업이 산다. 과소비는 국가경제를 좀먹지만 작은계처럼 거품빠진 실속 소비, 인간미가 넘치는 소비는 가정과 경제에 힘을 실어주는 핵(核)이다.”
〈나성엽기자〉news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