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35)

  • 입력 1998년 8월 27일 18시 54분


제2장 달의 잠행⑪

그가 아직 바늘을 뽑지 않은 물고기를 손바닥 위에 놓았다. 물고기는 더 이상 팔딱이지 않았다. 살 속의 바늘이 영혼까지 찢어버린 것일까. 물고기는 그저 느리게 아가미를 열었다 닫았다 할 뿐이었다. 야만적인 도륙 앞에 자신을 통째로 내맡겨버린 투명한 단추 같은 물고기의 눈…

통증이 독처럼 살 속으로 퍼지는 것이 보였다. 내 몸 속 아주 깊은 곳에도 지긋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가 돌연 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손을 으깨어 즙이라도 짜겠다는 듯 꽉 쥐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반지의 장식이 손가락 사이에 끼여 손가락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왔다.

아…

내가 신음소리를 내자 그는 놀랜 얼굴로 천천히 손을 열고 나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나를 거세게 끌고 걷기 시작했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여름풀이 무성하게 자란 공터를 지나고 짠 멸치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있는 창고들을 지나 쇠똥이 퍼질러져 있는 좁다랗고 가파른 산길로 들어갔다. 숨을 잘 쉴 수가 없었고 눈앞이 흐렸고 몸이 너무 가벼웠고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내장 깊숙이 바늘을 삼킨 것만 같았다. 발목이 찔레 덤불에 찔리는데도 아무렇지가 않았다.

숲은 빈약했고 어린 잡목들로 얽혀 있었고 송진 냄새와 나뭇잎 마르는 냄새와 젖은 흙냄새와 푸른 잎사귀 냄새와 그 모든 더위에 지친 습기로 어지러웠다. 그는 어느 허물어진 무덤 가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하루 종일 햇볕에 데워진 여름 숲은 지열로 인해 훈증탕처럼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나의 마음을 떠보듯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스쳐갔다. 나의 얼굴은 자석에 끌려가듯 그의 손길이 스치고 간 방향을 따라 길게 기울어졌다.

가슴이 터질 듯 숨이 차오르고 심장 깊숙이 내 몸의 가난이 느껴졌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몸이 간원하듯이 떨고 있었다. 난처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나를 숨길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의 팔을 뿌리쳤다. 그는 의외라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도 가쁜 숨을 쉬고 있었고, 얼굴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땀이 눈속으로 들어갔는지 아니면 난감할 때 생기는 습관인지 그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외로운 눈이었다. 내 몸의 가난처럼 그 남자의 가난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게도 그는 마치 나와 그렇게 마주 서기 위해 줄곧 내달려 온 외로운 마라톤 선수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늘 그렇지만 그런 일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다시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게 되는 일. 그 영혼을 보아버리는 일.

나는 즉시 그를 통째로 이해해버린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 이후에 오는 시간, 요컨대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그 시간이란 오히려 우리가 상대를 재확인하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리석게도 의심하고 약속을 원하고 부정하고 시험을 하고 기만하고 기만 당하면서 존재를 왜곡시키며 낭비하는 시간.

문득 숲의 나뭇가지들을 젖히며 송진 냄새나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이 무슨 신호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와 나는 동시에 누런 소나무 잎이 덮인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 숲의 나무들 사이로 파란 바다가 보였다. 시간이 흐르자 서늘한 바람이 땀을 바삭바삭 말려 몸에 잔소금 알갱이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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