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사건에서 위법이 드러나면 피고인은 처벌받는 게 당연하다. 민사소송에서는 불법성이 인정된 쪽이 패소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법관의 판단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총회꾼이 동원된 제일은행 주주총회 결의의 불법성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항의한 소액주주들에게 패소판결을 내린 서울고법 판단이 그런 점에서 눈길을 끈다. 패소한 소액주주들이 주총결의의 불법성을 인정받은 것만으로 만족하고 상고를 포기한 것도 이례적이다.
▼법관은 어떤 경우에도 법 원칙에 따르는 것이 정도(正道)이겠으나 공동체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 때도 있다. 그러나 현실을 지나치게 고려할 경우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해야 하는 법관의 정도를 벗어났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법원이 현실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인권보호와 정의구현 기능이 약화될 수도 있다. 그래서 갈림길에 섰을 때 법원은 보수적 경향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경제현실을 감안해 주총결의를 취소시킬 수 없다”는 설명 속에 법관의 고뇌가 엿보인다. 소액주주권 보호냐, 경제살리기냐의 갈림길에서 재판부는 후자에 무게를 둔 것이다. 법과 양심에 따른 고뇌의 결과라면 재판부에 경의를 표할 일이다. 그렇더라도 법을 뛰어넘어 정치 경제적 현실까지 고려한 것은 어쨌든 이단(異端)이다.
육정수<논설위원>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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