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상품’이라는 경기은행 직원의 추천에 따라 지난해말 특정금전신탁에 1억원을 넣어뒀는데 올해 경기은행이 퇴출되면서 원금의 상당부분을 떼일 처지가 된 것. 김씨는 “이 상품에 돈을 맡겼다가 잘못되면 원금을 떼일 수도 있다는 설명을 은행에서 한번도 듣지 못했다”고 항변하고 있다.
경기은행 특정금전신탁 가입자중 일부는 “은행측에서 손실 가능성에 대한 경고는 커녕 원금이 보장되는 상품인 것처럼 속여서 판매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경기은행 직원들로부터 ‘확정금리상품이라고 소개했다’는 확인서까지 받아둔 상태.
쌍용템플턴투자신탁운용의 유니스김법규팀장은 한국의 수익증권 판매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증권회사 창구를 가끔 찾는다.
“수익증권이 실적배당상품이며 위험도 따른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예요. ‘원금보장’이나 ‘확정금리’라는 말도 서슴없이 쓰더군요. 수익증권에 맡긴 돈이 어디에 투자되는지를 물어보면 ‘그런 것까지 알 필요없다’는 대답 뿐이고요.”
은행 신탁상품의 유치 경쟁이 치열할 때는 배당수익률을 실제보다 부풀려서 내건 사례까지 있었다.
SK증권은 지난해 파생상품투자를 했다가 발생한 손실을 누가 부담하느냐를 놓고 최근 미국의 모건개런티사와 수천억원대의 소송을 벌이고 있다. SK증권의 주장은 모건개런티측이 사전에 투자의 위험성에 대한 충분히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
이처럼 금융상품 투자 위험성에 대한 사전경고 여부는 ‘프로 대 프로’의 세계에서도 논란이 된다. 하물며 금융지식이 부족한 일반고객과 금융기관과의 거래에선 이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 한국금융연구원 김병연(金炳淵)연구위원의 지적. 김위원은 “선진국에서는 이런 거래에서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을 철저하게 예방한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실적배당형 금융상품과 비슷한 미국 뮤추얼펀드(회사형 투자신탁)나 주식 채권상품을 사고팔 때 어떻게 하는지를 보자. 뮤추얼펀드 등에 투자하겠다는 새 고객이 찾아오면 설문지를 통해 고객 투자성향을 파악한다.
씨티은행 미국지점에선 고객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지를 따져본다. 질문은 10여가지로 △돈은 어떻게 마련한건지 △투자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갑자기 돈을 찾을 일은 없는지 △원금을 떼이게 되면 잠을 못잘 정도인지 등 다양하다.
이런 질문을 통해 고객이 고위험―고수익상품에 적합한 투자자인지 저위험―저수익상품에 적합한 투자자인지를 가려내서 유형별로 투자할만한 상품들을 소개한다. 고위험 상품을 원하는 투자자에게는 맡긴 돈이 어디에 투자되는지 등이 적혀 있는 안내서를 주고 사전에 위험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해야한다. 한국씨티은행 서울지점 리처드 케니 이사의 설명.
“전재산이나 다름 없는 돈을 투자하는 사람에게 위험이 높은 채권 등을 추천한 영업사원은 감독기관으로부터 제재를 받지요. 그런 직원은 은행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해고되기 쉽습니다.”
한국에서처럼 실적배당형 상품의 예상수익률을 제시하는 것도 금지돼있다. 과거 수익률을 보여줄 수는 있다. 그런 경우 ‘수익률이 경제상황에 따라 나빠질 수도 있다’는 설명을 반드시 덧붙여야 한다는 것이 쌍용템플턴 김팀장의 설명.
심지어는 안전성이 높은 은행 예금상품에 가입하더라도 귀찮을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 금융선진국의 거래 상식이다. 이런 은행에선 상품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적혀있는 포켓형 소책자를 고객에게 준다. 읽어보기 힘들고 이해하기는 더 어려운 약관이나마 제대로 건네주지도 않는 국내 금융거래와는 전혀 다르다.
외환은행 국외심사실 김창태(金彰泰)과장은 “외국 금융기관은 주택담보대출을 받는 고객에게는 변동금리를 택할지 고정금리를 택할지에 대한 선택권을 준다”면서 “고객이 변동금리를 택하면 앞으로 금리부담이 얼마나 될지를 계산해 알려주는 것이 상례”라고 말했다. 변동금리 대출을 해주면서 ‘연리 %’라는 식으로 고정금리 같은 인상을 주는 국내 금융기관과는 큰 차이가 있다.
고객이 선택에 대한 최종책임을 지도록 하되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는 것은 유럽도 마찬가지. 지난해 독일 근무시절 김모씨(38·회사원)는 자동차보험 등에 가입하기 위해 알리앙스보험사에 전화로 문의했다. 그러자 영업사원이 곧 김씨를 찾아왔다. 그 사원은 두시간 가까이 보험상품의 내용과 약관 등에 대해 꼼꼼히 설명하고는 상품설명서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권리와 의무 사항을 꼼꼼히 읽어 보고 내일까지 결정해주세요.”
금융거래 위험에 관해 모든 것을 알려주고 ‘알겠습니까’를 수십번 확인하는 선진국. 고객은 도장을 꾹꾹 눌러찍고 금융기관 직원은 자세한 설명없이 서류만 챙겨놓는 한국. 그 둘의 차이는 금융기관이 망해본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는 것이 한국금융연구원 이건호(李建鎬)연구위원의 풀이다. 한국에선 실적배당상품의 경우 손실이 발생하면 금융기관이 자기 재산으로 물어주는 방식으로 때워나갔고 금리변동도 크지 않았기 때문에 궂이 거래위험을 따져볼 필요가 없었던 것.
외환 금융위기를 계기로 한국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금융 거래에 따른 위험성이 커진 것이다. 종전처럼 거래조건과 책임관계를 분명히 해놓지 않으면 앞으로는 고객이든 금융기관이든 누군가가 큰 손해를 보게 된다. 금융거래관행을 세계표준에 걸맞게 바꿔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천광암기자〉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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