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6월 미소(美蘇)공동위는 한반도 통일정부수립의 협의대상으로 정당 사회단체의 참가신청을 받았다. 남한에서는 무려 4백25개, 북한에서는 36개가 등록했다. 이 4백61개 단체의 회원총수가 당시 남북한 인구의 3배가 넘는 7천여만명에 달했다. 혼란을 강조할 때 지적하는 예이지만 결사의 자유를 강조한 자유민주주의 남한과 통일전선 전략을 중시한 공산치하 북한의 좋은 대조였다.
▼민화협의 한광옥(韓光玉)상임의장은 남북화해에 앞서 통일문제에 대한 의견수렴으로서 남남합의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요즘 부쩍 강조되는 남북교류란 해방정국에서 남북협상에 해당한다.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이 대표적인 남북협상지도자였다. 두 지도자는 남한사회 내 충분한 의견수렴 없이 북행을 단행했다. 남북요인회담을 주창한 두사람은 북측이 사전 조직한 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한 결과가 됐다.
▼올해는 건국 50주년이기도 하지만 민화협에는 분단 50년이라는 시각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분단극복이 민화협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반쪽 역사를 ‘한반도 최근세사 50년’으로 통합하는 것도 정치체제 통일 못지않게 어려운 작업이다. 민족화해협력이 이루어져야 그 문제도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민화협을 북한이 이번에는 받아들일지 주목된다.
〈김재홍 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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