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게임 (44)

  • 입력 1998년 9월 7일 19시 13분


제2장 달의 잠행(20)

우체국 문은 어린 시절에 본 시골 병원의 문처럼 길다랗고 둥근 스테인리스 손잡이가 달리고 성에 무늬의 반투명 유리가 끼워진 단단한 두짝의 목재 문이었다. 나는 출입문이라는 흰색 페인트 글자가 쓰여진 오른쪽 문을 밀었다. 그리고 규와 눈이 마주쳤다.

규는 내가 문을 열기 전부터 이미 문밖에 내가 온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반투명 유리 때문이었을까? 비스듬하게 얼굴을 든 채 턱을 내밀고 눈을 약간 내리깐 상태에서 한 순간에 전체를 훑어내리는 듯한 규의 무례한 눈은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모욕적이면서 동시에 깊숙이 간직된 본능을 일순간에 후끈 달아오르게 만드는 집중된 시선. 그는 역시 사춘기때, 자신의 미를 강박적으로 훼손시켜야했을 만큼 여리면서도 잘 생긴 남자였다.

우체국 안에는 한 명의 배달부가 우편물을 구역별로 분류하고 있었고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직원과 20대 초반의 여직원이 공과금영수증을 정리하고 있었다.

냉방이 되고 있었고 매끄러운 바닥엔 깨끗하게 물걸레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캐비닛만큼이나 키가 큰 벤자민 나무는 초여름 상추처럼 싱싱해 보이는 초록빛이었다. 좁다란 로비의 창문 역시 초록 창틀인데 바깥의 장식살을 따라 나팔꽃 넝쿨이 타고 올라바람에 살랑거렸다. 창문 곁엔 녹슨 철제 팔걸이의 구식 비닐 소파가 하나 놓여 있고 어디에 있는 지 모를 라디오에서 방송국의 로고송이 끝나자 ‘알함브라의 궁전’이라는 오래된 기타곡이 흘러나왔다. 실내의 빛은 전체적으로 연한 배추잎같은 푸른빛을 뛰었다. 기능적이고 소박하고 청결한 시골의 우체국 실내였다.

나는 친구에게 책과 짧은 편지를 띄우려고 했다. 여직원이 내 책의 무게를 달고 우표 를 내주고 내가 돈을 치르고 우표를 붙이는 동안 나물 꾸러미를 든 노파가 우체국에 들렀다. 노파는 나물꾸러미와 함께 도시의 아들이 보내 준 우편환을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내놓았다. 그리고 청년 한 명이 팩스를 보내기 위해 들렀고, 우표를 사기 위해 들른 농협의 아가씨도 있었다. 책을 우편물 상자 속에 넣고 나와 차 앞에 서 있으니 규가 뒤따라 나왔다.

―지금 바로 휴게소에서 봅시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거두절미하고 말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휴게소 뒤편 도로에 차를 세우고 내려 가게로 들어갔다. 휴게소 여자는 처음으로 나에게 아는 체를 했다. 슬러시에서 얼음이 담긴 오렌지 주스를 말없이 뽑아주고 돈을 받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웃었다. 가게 부엌 바닥엔 여전히 국수 그릇이 가득 쌓여 있고, 김치 양념 물이 든 나무 젓가락들이 널려 있었다. 딸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수처럼 외가에라도 보낸 것 같았다.

차안에서 주스를 마시고 있으니 규의 왜건이 이내 나타났다. 그는 나의 곁에 차를 세우더니 자신의 차로 옮겨 타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가방과 주스가 든 종이잔을 들고 그의 차로 옮겨갔다.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사후 세계를 믿어요?

규는 감정 없이 말했다.

―아뇨.

나는 그의 손등에 새겨진 말보로 자국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죄를 지어도 되겠군. 게임을 시작하는 거요?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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