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51)

  • 입력 1998년 9월 15일 19시 26분


제2장 달의 잠행(27)

하늘을 올려다보니 샛노란 달이 고래처럼 큰 구름 속에서 이제 막 빠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집에서 나온 그 방향대로 곧장 숲길로 들어섰다. 원래 짐승이었던 것처럼 어두운 숲속이 친밀하게 느껴졌다. 멧돼지처럼 깊은 동굴 속에서 홀로 잠들 수도 있을 것 같고 다람쥐처럼 나무를 쏜살같이 타고 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검푸른 숲속에서 새들이 다른 가지로 옮겨앉는 작은 기척도 들렸다. 담비같은 작은 짐승이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소리도 해묵은 나뭇잎들 아래로 뱀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도, 풍뎅이와 나방이 날개짓하는 소리도…….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뜻밖에도 호경이 마당에 서 있었다. 기가 막힌 얼굴에다 잔뜩 화가 난 음성이었다.

―산책.

―너 몽유병자니? 이해가 안돼. 그 옷차림에 실내화 바람으로? 어디로 나갔니?

―…… 현관문으로.

―거실에 앉아 있던 내가 모르게?

―넌 없었어. 화장실에 간 때였나 보지.

호경은 다행히 납득하는 것 같았다.

―불은 꺼져 있는데 자는 줄로 알았던 너는 침대에 없고, 네 방 창문은 방충망 문까지 활짝 열려 있었어. 놀랬잖아. 넌 겁도 없니? 이 산 속에서 한밤중에 돌아다니게?

―이젠 무섭지 않아. 전혀. 난 이제 혼자 저 무덤들 뒤로 난 숲길로 들어갈 수 있어. 해봐? 우리 같이 가볼까?

―관둬. 제 정신이 아니야.

―달을 봐. 얼마나 환한지…… 저 집채처럼 큰 검은 구름, 미칠 것 같아.

나는 팔을 벌리고 천천히 원을 돌았다.

호경이 섹스를 원했다. 나는 호경을 받아들였다. 서른 세살 7월이었다. 내 몸은 변했다. 나 자신마저도 낯설어 깜짝 놀라는 위험한 관능이 그 속에 은닉되어 있었다. 그건 참으로 낯설어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를 불안한 것이었다. 생을 가장 어둡고 질척한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동물적인 몰입. 이것은 평범한 여자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선물일까, 혹은 극복해야 할 재앙일까. 규와 섹스를 할 때면, 더 이상 먹지도 말고 잠들지도 말고, 낮이 되지도 말고, 밤이 되지도 말고 그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는 꿈에 빠진다. 규를 생각하자 불안하고, 자극적인 이상한 활기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의 몸을 감쌌다. 내 몸은 절정에 이르러 밤의 숲이 울리도록 커다랗게 소리를 냈다.

―넌 이곳에 온 후 달라졌어. 이상해. 네 몸에서 낯선 진동이 느껴져.

잠들기 전에 호경이 중얼거렸다. 나는 여전히 부정하고 감미롭고 혼란스러운 관능 속에 빠져 있었다. 마치 두 남자와 정사를 한 것 같았다. 네 개의 눈동자, 두 개의 입술, 네 개의 손, 스무개의 손가락, 네 개의 다리, 그리고 분간할 수 없는 겹겹의 숨소리……

호경이 깊이 잠들어갈수록 나는 또렷하게 깨어났다. 바로 윗집에 있는 규가 또 다시 그리웠다. 그와 함께 온전한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갈망이 나를 괴롭혔다. 밤이 지나가기 전에 다시 한번 더 그를 볼 수 있다면, 그가 냉정한 얼굴을 풀고 나를 향해 웃어 준다면…… 오랜 뒤에야 깨닫게 된 일이지만 나는 믿어지지 않게도 그토록 급속하게 그에게 예속되어 버린 것이었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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