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첫 장편소설 「세상의 저녁」펴낸 정찬씨

  • 입력 1998년 9월 16일 19시 38분


작가 정찬(45)에게 79년 12월 12일의 밤을 물어보라. 그는 어눌한 부산 사투리로 이렇게 답하리라.

“광화문에서 술을 먹는데 갑자기 천지가 진동을 하데. 밖으로 나가보니 차 한 대 안 다니는 길 위로 탱크들이 달리는 거라. 탱크보다 탱크 위로 둥실 떠 있던 달이 어찌나 빛나든지.”

탱크와 달. 쿠데타를 주도했던 그날의 장군들은 영욕을 가파르게 줄타기 한 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달은 변함없이 뜨고 진다. 정찬은 그렇다. 쿠데타 순간에도 탱크보다 달에게로 눈길이 가듯 그의 작품들은 아귀다툼의 세태 틈바구니에서 존재의 저 밑바닥, ‘궁극(窮極)’을 더듬어 찾는다. 등단 15년만에 내놓은 첫 장편소설 ‘세상의 저녁’(문학동네)은 오랜 세월에 걸친 그의 집요한 구도행적이다.

한 사나이가 눈 쌓인 거리에서 얼어 죽는다. 신부가 되고자 했던 황인후. 그러나 신의 종이 될 수 없었던 가혹한 운명. 그는 신부의 사생아였으며 간질환자였다. 자신의 아들마저 선천성 심장기형으로 출생 직후 숨을 거두자 그는 스스로 걸인이 되어 짐승처럼 떠돈다. 신을 그토록 간구한 내가 왜 이런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 마지막 질문을 품고 찾아간 아버지, 빈첸시오 신부는 신이 그를 버리지 않았으며 지극히 사랑하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았다면, 그리하여 무섭게 버림받은 그대의 모습 위로 흘러내리는 신의 눈물을 보았다면 암흑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텐데.”

죄악에 대한 심판자도, 기적을 일으키는 창조주도 아니며 오로지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무력하게 눈물 흘릴 뿐인 하느님. 신성(神性)에 대한 작가의 이런 해석은 무엇이 가치있는 삶인가에 대한 생각에 닿아 있다.

‘…나는 인간이 가진 능력 중 가장 귀중한 것이 슬퍼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존재의 불완전함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한없이 슬퍼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94년작 ‘섬’중)

더 이상 스스로를 위해 울지 않게 된 뒤 황인후는 버림받은 이들의 목자로서 신을 대신해 눈물 흘린다. 그의 최후는 거지노인의 끼니를 얻기 위해 겨울 거리에 나섰다가 평온한 얼굴로 눈발 속에 조용히 쓰러지는 것이었다.

“신에 대한 고민은 관념이 아니라 일상의 문제입니다. 더 완전한 모습의 인간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나는 신에게로 향하는 길을 탐구했습니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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