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의 가족들이 온 뒤로는 규를 만날 수 없었다. 그의 차가 하루에도 몇번씩 분주하게 언덕을 지나 다니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저녁마다 초대된 사람들의 차가 줄을 지어 마을을 지나 언덕길로 올라갔다. 그는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벌레들을 쫓느라 젖은 풀을 태워 연기를 마구 피워올리고 바베큐 파티를 하거나 회를 먹고 매운탕을 끓이거나 마당에서 불을 붙여 닭을 튀겨 먹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아이들과 여자들이 요란한 비명을 내지르며 춤을 추기도 했다. 어느 때는 외치는 소리속에 규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오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그의 음성만을 따로 구분하며 들으며 부엌에서 감자를 썰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혼자서 노래 하기 시작했다.
‘그대가 떠나버린 빈집에 혼자 갔네
아픈 마음으로 다리를 절며 갔네.
그대는 없고 그대 손을 탄 고양이 한 마리 굶주려 맴도네.
우리 처음 본 날은 나뭇잎 푸르던 무성한 여름
지금은 바람 불어도 흔들릴 것 없는 황량한 겨울 지나가지 않을 겨울
그대는 영영 소식 없고 그대 가슴에 못 박은 말들 때문에 내가 병드네’
귀를 기울여 듣고 있으니 가슴이 패이는 듯 아파왔다. 나는 도마질을 멈추어 버렸다. 그는 또 무슨 상처가 있어서 사랑 없이 살기로 결심하였을까….
노래를 들은 다음 날이었다. 이른 오전에 숲길을 산책하다가 그의 가족과 맞닥뜨렸다.
아이들은 곤충을 잡는 망과 플라스틱 망으로 만들어진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샛노란 망속엔 날개 끝에 태극 무늬가 선명한 짙은 청색의 나비와 커다란 검은 나비, 호랑나비들이 들어 있었다. 나비 채집을 나선 것 같았다. 그곳 산엔 유난히 나비와 나방의 종이 풍부해서 특별한 지역으로 보호되고 있다고 들었다. 그의 아내는 뱀에 대한 꺼림칙한 염려 때문인지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크고 긴 남자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는 반바지 차림에 털이 부숭부숭하게 난 다리를 내놓고 가죽부츠를 신고 있었다. 나는 커다란 나뭇잎 무늬가 프린트 된 A라인의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맨발에 굽이 있는 슬리퍼 차림이었다. 길이 갈리는 곳에서 그들과 마주친 나는 그들과 스치지 못하고 그만 어둑한 박쥐나무 숲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한 순간 규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아내는 규의 팔을 자신의 가슴에 누르도록 꼭 잡고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당장 여자를 밀쳐내고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의 목, 어깨, 가슴, 키, 다리의 힘, 냄새… 나의 몸 속에서 당장 꺼내놓을 수도 있을만큼 그의 육체가 주는 흥분은 내 살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바늘 하나가 척추에 꽂히는 것 같은, 몸을 마비시키는 한덩이의 아픔이 몰려왔다. 분노와 무력감과 극도의 환멸과 슬픔. 나는 박쥐나무 숲의 그늘 한가운데에 서서 규의 아내가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뜨거운 눈물 때문에 숲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내 속에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버린 것 같았다. 제어할 수 없는, 통제 불가능한, 속수무책의… 나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를 나무랐다. 점점 더 감상적인 여자가 되어가고 있구나.
<글: 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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