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54)

  • 입력 1998년 9월 18일 19시 04분


제2장 달의 잠행(30)

9월의 첫날 수와 휴게소 집 딸애를 학교에서 태우고 갔을 때, 휴게소 여자는 잔디밭 한가운데에 놓인 비치 파라솔 아래 앉아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뜨거운 어묵국을 안주 삼아 뜯어놓고. 휴게소 길 앞엔 코카콜라 병을 산처럼 높이 쌓은 트럭과 긴 철근을 실은 트레일러가 세워져 있고 운전기사들은 차안에서 혼곤한 낮잠에 빠져 있었다. 그 뿐이었다. 휴게소는 낯선 남자들이 갑자기 부려놓은 낮잠의 기운에 함께 도취된 듯 나른하고 기묘한 기류에 휩싸여 있었다.

―이리와서 소주 한 잔 받아요.

여자가 잔 속의 술을 홀짝 마시고 내게 내밀었다. 아이들은 이미 잔디밭으로 달려가 뒹굴고 있었다. 나는 여자가 앉은 비치 파라솔 아래로 다가갔다. 붉게 열이 오른 얼굴에 뺨에서 귀까지 반점처럼 커다란 자주색 멍이 들어 있었다. 추위를 느끼는지 스웨터를 걸쳐 입고 어깨를 웅크리고 있었다. 처음 본 이후 겨우 늦봄과 여름을 지냈을 뿐인데, 그 사이 3년이나 4년은 흐른 것처럼 상해 있었다.

―어디 아파요?

나는 소주잔을 입에 댔다가 떼며 물었다.

―몸살인가 봐…. 개자식이 간밤에, 질근질근 밟아 뭉개고 나갔어.

그렇지 않아도 굵고 투박한 여자의 음성은 누가 물 속에 처박은 듯 꽉 잠겨 있었다.

―왜….

나는 말을 삼켰다. 왜 이렇게 당하면서 함께 살고 있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너무나 많은 여자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는가.

―3년 전에 도망친 적이 있었어. 그땐 어시장에서 횟집을 하고 있었지. 3평 가게에 방 한 칸이 딸린 선창 바로 앞 가게였어. 어느 날 회칼을 들고 나를 썰어버리겠다고 설쳤어. 그땐 정말로 죽을 것 같았지. 벌써 여기저기 엄청나게 맞아서 뒷머리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어. 난 그 미친 새끼의 머리를 의자로 치고 가게 앞에서 울고 서 있던 딸아이를 업고 캄캄한 시장의 어물전 골목을 내달렸어. 그리고 큰거리에서 택시를 탔지. 택시 기사가 어디 갈 거냐고 물었어. 나는 멀리 가자고 말했지. 멀리 멀리. 아주 먼데로….먼 곳에 가서 한여름 내내 도로 공사하는 함바집에서 일을 했지. 거기서 인부 하나를 만나 살림도 차렸어… 그 남자가 딸애를 힘들어 해서 애는 밥집에서 같이 일하던 여자 집에다 맡기고 살았어. 그렇게 한 일년 지나갔지. 괜찮은 세월이었어….

여자가 얼굴로 쏠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가짜 반지조차 하나 끼지 않은 퉁퉁한 손가락이었다.

―그 남자는 나이도 많았는데, 나한테 참 잘해주었어. 예뻐해 주었지. 월급도 가져다 주고 머리핀을 사다주고, 시장 길을 지나다가 원피스도 사주고, 고기 구워 먹이고, 겨울밤엔 얼음처럼 차고 시린 사과 세 알을 품안에 넣어 오기도 하고, 내 발을 씻겨주기도 하고… 한번도 안 때렸어. 가난했지만 내 평생에 가장 행복했던 때였지. 하지만 그때도 그 남자 몰래 많이 울었어. 남자하고 살겠다고 딸애를 남의 집에 맡겼으니, 팔자가 더럽다 싶었지. 딸애를 위해서는 짐승 같은 놈이라도 지 아빠가 낫겠다 싶기도 하고…. 그런데 어느 날 경찰이 들이닥쳤어. 그 놈이 내 앞으로 빚을 빌리고 내가 도망가고 난 뒤 채권자에게 나를 고소하라고 부추겨서 전국에 지명수배가 되게 만든 거였어. 난 잡혀 올라와서 경찰서 유치장에 한 열흘 갇혀 있었지.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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