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차웅/사생활 침해 정부의 불감증

  • 입력 1998년 10월 6일 19시 27분


80년대 초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있었던 일. 시교육위가 관내 초등학생들의 지문을 찍어 보관하겠다고 밝혔다. 어린이유괴살해사건이 빈발하는 데도 경찰이 피살자의 신원을 몰라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자 교육위가 내놓은 어린이보호대책의 하나였다. 그러자 학부모 등이 들고 일어났다. 지문채취는 인권침해인만큼 어떤 이유로든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논란 끝에 이 문제는 학부모가 동의하는 경우에만 지문채취를 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몇년전 일본에서 ‘투명 쓰레기봉지’논란이 있었다. 쓰레기봉지에 음식찌꺼기나 범죄에 사용될 수도 있는 흉기를 담아 버리는 일이 잦자 아예 쓰레기봉지를 투명한 것으로 바꾸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러자 일본거주 외국인들이 먼저 반발하고 나섰다. 쓰레기봉지의 내용물이 보이면 개인의 사생활 침해라는 지적이었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도 개인의 사생활보호에 둔감한 편이다. 정부도 국민 개개인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갖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주민등록원표다. 이런 개인의 신상정보 노출은 사실 심각한 문제다. 언제 누구에 의해 악용될지 모른다. 앞으로 정보화사회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런 피해는 심해질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들 태연하기만 하다.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청이 내놓은 고시내용이 가관이다. ‘시판 중인 2종의 발기부전치료약이 오남용될 우려가 있다’며 1회 판매량을 제한한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약국이 이 약을 사가는 사람의 이름 나이 주소 등을 기록해 2년간 보존하도록 의무화한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세금내는 국민 개개인의 사생활보호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다. ‘국민 개개인의 신상정보를 적게 갖고 있는 나라일수록 선진국’이라는 말이 있다. 보건복지부가 곰곰 되씹어 봐야할 말이다.

김차웅<논설위원〉cha4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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