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는 선글라스를 벗고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내 앞에 서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연하고 슬프고 무력한 표정이었다. 그는 그저 오래 바라보았다. 피부가 벗겨진 얼굴과 목이 졸릴 때 난 검은 손자국과 멍을 숨기고 있는, 벗어던진 빨래처럼 헐거운 나의 몸을. 그는 나를 부축해 일으키더니 자신의 차에 실었다.
―집에 가야 해요.
―당신은 지금 운전 못해.
그는 성난 얼굴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14번 국도에 들어서자 그는 차의 속도를 거칠게 올렸다. 시속 160 킬로미터였다. 나는 가능한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 생은 이미 논리성을 상실해버린 상태였다.
―빌어먹을… 독하게 맑은 날이군.
그랬다, 독하게 맑은 날. 날씨라도 흐리면 한결 견디기 쉬울 것이었다.
바다로 가는 길목에 있는 휴게소들은 즐겁고 번잡했던 여름과 달리 얇은 햇빛과 싸늘하고 가느다란 바람과 마른 낙엽들만 날릴 뿐 쓸쓸했다.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잠시 거울 앞에 섰다. 다친 얼굴과 흐릿한 눈빛, 입가의 상처, 목가의 눌린 손자국… 이미 궤도를 벗어난 생이었다. 틈만 노리고 있었던 듯 눈물이 마구 솟구쳤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거울 화장실 벽에 기대 서 있다가 나가니 규는 아직여자 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자 규는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무서워하지 마라.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네가 원할 때까지 난 너와 함께 할거다.
우리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다시 출발했다. 그는 계속해서 섬이 있는 남쪽으로 달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남편이 얼마나 알게 된 거야?
―… 전부. 끝까지… 상대가 당신이라는 것만 제외하고… 모두 다.
―어쩌다가?
―… 당신에게 쓴 편지가 있었어요. 그걸 보았어요. 그 속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죠… 괴로운 사실들과 말로 할 수 없었던 감정들, 정사와 고백들… 그리고 침묵속의 기다림들. 난 게임에 졌어요. 그래서 그 편지들을 썼고 부치지도 못할 것을 가방에 넣고 다닌 거죠. 게임에 이겼더라면 남편에게 발각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래요, 그게 문제죠. 내가 게임에 졌다는 것…
―그래서 이렇게 다쳤구나.
―…
―미안하다. 내가 너를 버려놓았구나. 나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진다. 정말 미안하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부희 집 앞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때를. 죽음과 같은 공허한 잠 속에서 시작된 그 게임의 당위성을… 언젠가 나는 스물 한 살에 만난 남자가 평생동안 오직 나만을 사랑하고 나 또한 단 하나의 남자만을 사랑하며 평생동안 같은 삶을 공유하려던 꿈을 꾼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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