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윤덕민/21세기의 韓日관계

  • 입력 1998년 10월 11일 19시 44분


과거 한일관계는 무미건조한 사과와 식지 않는 분노의 반복이었다.

특히 최근 수년간 가까운 우방관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양국 사회의 반일(反日)과 혐한(嫌韓)의 골은 깊어지고 있었다.

21세기를 불과 2년 앞둔 시점에서 한일관계는 여전히 과거의 굴레를 떨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의 한일 정상회담은 이런 점에서 과거사문제를 매듭짓는 귀중한 전기를 마련했다는데 가장 큰 의의가 있다.

▼과거사 해결 전기 마련▼

우리는 일방적으로 사과를 요구하기보다는 매우 솔직하게 접근했다. 21세기까지 양국관계를 과거의 굴레에 두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본도 그 필요성을 인식했다.

결국 ‘21세기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일본은 ‘통절한 반성과 사죄’의 뜻을 명기했다.

물론 사죄 한마디로 일제 35년간의 고통과 슬픔의 응어리를 모두 풀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의 사과수준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와 관련, 우리는 너무 형식과 명분에 치우쳐 일본의 사죄표현에만 집착해 왔다는 느낌이 든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부수는데 수천억원을 썼지만 정작 일제에 의해 고통을 받았던 수많은 분들을 위해 한 일은 별로 없었다.

명성황후 시해, 군대위안부 문제 등도 따지고 보면 부끄럽게도 일본인들이 더많이 연구하고 일본인들에 의해 더많이 제기돼 왔다는 측면마저 있다.

우리는 이번 공동선언을 계기로 과거사 문제를 형식과 명분보다는 실질적 차원에서 양국이 힘을 합해 풀어가야 할 것이다.

이번 사죄에도 불구하고 일본내 일부 보수세력의 망언은 지속될 것이다.

우리가 그같은 망언에 과민반응을 보인다면 한일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한일 양국민의 노력과 인내 없이는 정상회담을 통해 어렵게 마련된 과거사 청산의 계기를 살릴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은 또한 최악의 경제상황에 처한 한일 양국이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가 주요한 쟁점의 하나였다.

우리는 IMF관리체제로부터 조속히 벗어나기 위해 피눈물 나는 구조조정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일본경제가 건강을 되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경제의 회복은 또한 일본경제의 회복에도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반도체 조선 철강 자동차 생산국인 한국과 일본은 라이벌 관계이면서 동시에 긴밀한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두 나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한 경제회복은 아시아경제의 추락을 막는 가장 핵심적인 사안일 것이다.

공동선언의 행동계획에 명시된 양국의 경제협력은 어김없이 실천되어야 한다.

한편 대북정책과 관련, 일본은 우리측의 입장에 기본적인 이해를 보이면서도 다소 유보적인 모습이었다. 코너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따라서 북한을 코너에 몰리지 않게 하면서 스스로 변화(개혁 개방)하지 않으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주지시켜 나가는 정책이 필요하다. 일본의 냉철한 정책을 기대한다.

김대통령이 초청한 아키히토(明仁)천황의 방한문제가 어떻게 귀결될지가 주목된다. 김대통령은 2002년 월드컵축구 개막식전에 아키히토천황이 방한해 줄것을 제의했는데 천황방한이 이뤄질지는 우리 국민의 감정과 의식에 달려있는 문제라 하겠다.

만약 2002년 이전에 천황이 방한하게 된다면 양국관계에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말보다 실천이 중요▼

그러나 천황이 방한할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그것은 한일간의 불편한 관계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하겠다.

양국이 이번 공동성명에서 선언한 파트너쉽이 말로만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옴겨졌을때 천황방한의 기초가 다져질 것이다.

끝으로 정부가 천황으로 호칭하기로 한 것과 관련해서 국민사이엔 찬반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21세기 새로운 파트너십 관계를 구축하려는 시점에서 상대방의 호칭을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일부언론이 외교관례와 미래지향적인 양국관계 구축을 위해 천황이라고 호칭하기로 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바람직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윤덕민<외교안보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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