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 33]대학의 경쟁력

  • 입력 1998년 10월 15일 19시 43분


세계적인 석학인 조셉 스티글리츠 세계은행(IBRD)부총재가 미국 프린스턴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집안과 주위 일에는 일체 관심을 끊은 채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던 스티글리츠가 예기치않게 이혼당했다.

한동안 미국 학계에서는 “당신, 일요일까지 연구실에서 보내다간 스티글리츠처럼 이혼당한다”는 반(半)경고성 농담을 듣는 교수가 허다했다. 그만큼 미국의 교수들은 열심히 공부한다. 물론 학문을 좋아하기 때문이지만 그것 못지않게 임용 탈락이라는 채찍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당국은 대개 2년간 조교수 계약을 체결한다. 이 2년동안 연구실적이 웬만큼 나쁘지 않으면 2년 재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그러나 4년뒤에는 추상같은 교수평가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비로소 부교수로 승진할 수 있다. 여기서 탈락하면 즉시 학교에서 퇴출당한다.

미국내에서도 교수평가가 엄격하기로 유명한 MIT공대의 경우 교수 5명중 1명정도만 정년이 보장된다. 조교수로 임용된뒤 정교수까지 생존할 수 있는 비율은 20%에 불과하다.

사실상 정년이 보장돼 ‘한번 교수면 영원한 교수’라는 평판을 받는 우리나라 교수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국내 대학 교수들은 조교수로 임용된뒤 대개 8∼10년이면 정교수로 승급된다. 정교수까지 각 단계마다 승급평가를 받지만 탈락하는 사례가 나온 것은 겨우 몇 년 안된다.

서울대의 경우 정교수가 전체 교수의 61%, 부교수 20% 조교수는 19%. 직급이 올라갈수록 인원이 많아지는 역삼각형 구조다. 승진탈락자가 거의 없기 때문.작년과 올해 서울대에서 연구실적 미비로 탈락된 교수는 딱 한 명. 그 교수도 “선배교수를 비판한데 따른 보복성 조치”라며 소송을 내놓은 상태다.

“우리 대학도 미국 못지 않은 승급평가제도가 있지만 유명무실합니다. 실력보다 학연(學緣)이 우선하는 한국 교수사회가 엄격한 교수평가를 가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교육개발원 강태중·姜泰重선임연구원)

실제로 지방 모 국립대학에선 연구논문발표 등에서 낙제점을 받은 교수가 학장이 주는 높은 점수 덕분에 자리를 지켜 학생들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경쟁이 없는 우리 교수사회는 무사안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연구와 강의를 부업으로 여긴채 정치판과 매스컴 주변을 기웃거리거나 기업체 연구프로젝트 수주활동 등을 주업으로 여기는 교수가 수두룩합니다. 이로 인한 피해는 학생들이 고스란히 입고 있습니다.”(현택수·玄宅洙 고려대 사회학과교수)

학생들이라고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연세대 학생회가 작년말 펴낸 ‘강의백서’. 일부 교수의 강의노트와 이른바 ‘족보’로 불리는 시험문제 리포트제목이 가득 실려 있다. 해마다 똑같은 강의에 똑같은 시험문제를 내오던 ‘녹음기’교수들은 더이상 환영받지 못하게 됐다.

교수의 경쟁력 저하에 따른 불량 졸업생 양산의 폐해는 대학의 문제만이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 윤순봉(尹淳奉)이사의 지적대로 ‘지식산업시대에는 지식을 창조하고 전파하는 대학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경제위기에 빠지면서 교수사회도 더 이상 안전지대에 머물 수 없게 됐다. 올들어 대학 안팎에서 교수들을 자극하는 목소리가 유난히 강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연구실적이 미미하면 강단에서 퇴출당할 것’ ‘연봉제를 도입하겠다’ ‘세계 유력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만 인정하겠다’….

IBRD에 따르면 76년 상품제조원가 중에서 원자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45%로 가장 높았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96년에는 원자재 비중이 24%로 크게 줄어든 반면 중급 또는 고급기술의 비중은 54%로 급등했다. 지식이 한나라의 성쇠를 좌우하는 수준이 된 것이다. 김경엽 대우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이를 “중고급기술 개발인력을 양성하는 대학의 비중이 이만큼 높아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학술분야의 지식수준을 비교해볼 수 있는 미국의 과학인용색인(SCI)에 올라있는 우리나라 전체 대학교수 논문발표 건수는 7천7백28건. 미국 하버드대학(8천3백64건)보다 적으며 일본 동경대(5천5백36건)보다 40% 많은 정도다.

인구 1만명당 논문발표수는 세계 42개 주요국가중 중하위권인 29위(1.69편)에 그쳤다. 홍콩(5.03편) 싱가폴(4.95편) 대만(3.25편) 등 경쟁국가에 비해 현저히 뒤쳐진 것.

제임스 올펀슨 IBRD총재는 ‘지금은 지식이 달러 못지 않게 중요한 때’라는 말로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초거대자본이 광속도로 거래되는 것은 지식혁명 덕분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지식경쟁력이 떨어지면 영원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국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선진국과의 지식격차를 줄이는 게 급선무입니다.”

〈이희성기자〉lee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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