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임연철/지식계층 불법복제

  • 입력 1998년 10월 16일 19시 12분


가령 조선왕조기간 중 지진이 몇번 있었는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3년 전만 해도 조선왕조실록 한문원본 8백88책이나 국역본 4백13권을 정독하며 찾을 수밖에 없었다. 권당 3백페이지가 넘는 국역본으로 읽는다 해도 수년이 걸리는 방대한 작업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95년에 나온 ‘국역조선왕조실록’ CD롬을 이용해 컴퓨터로 찾아보면 1천9백51건의 지진목록이 불과 수분만에 파악된다.

▼건수뿐만 아니라 원자력 시설이 있는 울진이나 북한의 영변에서도 지진이 발생했었다는 기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역사학자가 몇년을 거쳐야 할 수 있는 작업을 4장의 CD롬에 담아 간단히 해결하게 된 것이다. 당시 민간기업인 서울시스템이 50억원을 들여 제작한 실록 CD롬이 나오자 학계의 환영은 대단했다. 정부에서는 훈장까지 수여했다.

▼환영과 수훈의 기쁨도 잠시, 실록 CD롬의 불법 복제품이 판치며 서울시스템은 지난 10일 최종 부도를 맞았다. 정품 실록 CD롬을 고작 2백50세트밖에 팔지 못해 제작비의 4분의 1도 못건졌다며 허탈해 하는 회사 관계자의 말에서 지적소유권을 우습게 아는 우리의 풍토가 그대로 느껴진다. 실록 CD롬 이용자라면 적어도 지식계층일텐데 불법 복제품에 맛들이는 지적풍토가 한심할 뿐이다.

▼소프트웨어 아래아한글을 개발한 한글과 컴퓨터사가 지난 6월 불법 복제품 범람으로 경영위기를 맞았을 때도 정품을 써야 한다는 자성론이 일었으나 분위기는 별로 바뀐 것 같지 않다. 애써 만든 지적 창작품이 불법 복제품에 밀려 외면당하는 사회의 미래는 없다. 보람도 없는 일에 누가 매달리겠는가. 불법 복제품 사용은 ‘절도행위’라는 사회적 의식의 대전환이 절실하다.

〈임연철 논설위원〉ynch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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