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2)

  • 입력 1998년 10월 21일 19시 19분


의형제 ②

그들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교정을 나오고 있다. 운동장에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다소 비장한 표정이다. 숙제를 안 해 매맞은 고등학생이라기보다는 주재소에서 고문을 받다 풀려난 독립투사 같다.

네 개의 그림자 중 맨 왼쪽에 있는 것이 하얀 얼굴의 배승주이다. 그의 눈을 보면 여름 한낮 세숫대야에 담긴 물 그림자가 처마 밑에서 어른거리는 장면이 생각난다. 여학생들을 사로잡는 것도 그가 한국남자로서는 드물게 눈에 표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길다랗고 벌어진 그림자는 두환의 것이다. 교복 상의 속에 들어 있는 가슴팍이 나왕이나 미송을 집어넣은 것처럼 단단해 보인다. 학교에 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복도에 내놓은 다리 한짝을 맹렬히 떠는 것밖에 없는데, 누군가 “야, 다리 치워”라고 하면 “알았어” 하고 대답할 때 말고는 종일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의사소통에는 주로 턱을 이용한다.

가운데에서 걸어가고 있는 그림자는 가장 키가 작다. 성은 조이고 이름은 국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조국! 이렇게 불린다. 넓적한 얼굴에 눈썹이 짙다. 왜 중학교 때 쓰던 ‘완전정복’에서 나폴레옹의 초상을 오려가지고 다니는지 물어보면 커다란 콧구멍을 몇 번 벌름거린 다음 “보이스! 비 엠비시어스!”라고 우렁차게 대답한다.

그리고 오른쪽 끝에 있는 것이 바로 나, 김형준이다. 어찌어찌하다보니 그날 우리는 중국집의 후미진 방을 잡고 앉아서 군만두 한 접시와 배갈을 시키고 있었다. 모두들 처음 마시는 배갈이었다. 단 한 잔에 나가떨어졌다. 그랬으니 네 개의 팔을 엇갈려 엮은 다음 그 위에 배갈병을 올려놓고는 돌아가며 나발을 부는 의식을 그토록 경건하게 치렀을 것이다. 도저히 삼키지 못하고 뱉어버린 배갈에 대고 성냥불도 붙여봤던가?

어찌 됐든 그로써 의형제가 탄생했다.

다음날 술이 깨자 물론 우리는 크게 후회했다. 자신이 나머지 셋과는 수준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만 우리는 형제처럼 닮아 있었다. 그러나 의형제의 운명은 이미 피할 수 없게 우리를 압박해왔다. 학교에 가보니 반 아이들이 당장 우리를 ‘만수산 4인방’이라는 호칭으로 묶어 부르는 것이었다. 물리선생의 가공할 티자와 폐타이어로 만든 검은 슬리퍼의 협공 아래 한데 엮여서 몸을 비트는 우리의 모습, 그것이 드렁칡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만수산 드렁칡.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서로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마음 깊이 믿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분명한 것은 서로의 인생이 얽혀버렸다는 사실이다. 드렁칡이 된 사연부터가 그렇듯이 우리의 인생은 끈질기게 꼬였고 그럴 때마다 다투어서 서로를 탓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 모두는 사십에 이르렀으며, 사실로도 칡처럼 하잘것없는 존재가 되어갔던 것이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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