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일본 교도(京都大)대에 객원연구원으로 나가있는 모친 전혜성(全彗星·69)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해야겠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선친 고광림(高光林)박사의 묘소를 찾아봬야겠다는 것.
“인권차관보는 내가 한번 하고 싶어 평생 준비해온 일이면서 동시에 선친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이제 나를 통해 실현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교수는 22일 특파원과의 전화인터뷰에서 인준받은 소감을 이렇게 밝히면서 선친이 자신에게 끼친 정신적 감화를 술회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가 처음 찾은 한국은 60년 4·19혁명직후. 당시 고국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넘쳐흐르던 나라였다. 그 때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있던 고광림박사는 장면(張勉)정권에 참여하기 위해 가족들을 이끌고 한국으로 왔다.
“당시 나는 지금 8세 된 내 아들보다 어린 나이였지만 전쟁의 참화를 딛고 민주주의를 일궈낸 한국민과 이 대열에 동참하려는 부모님의 정열을 잊을 수가 없지요”라고 말했다.
주미특명공사로 임명받아 다시 미국으로 건너온 선친 고박사는 5·16이 나자 군사쿠데타에 반대해 정치적 장래를 포기하고 미국에 남았다.
고교수는 “그뒤 우리 6남매와 어머니까지 모든 식구가 미국 시민권을 받아 미국인이 됐지만 선친만은 한국여권을 간직한 채 한국인으로 살다 돌아가셨다”면서 “일부 한국언론에서 선친이 미국에 망명했다는 보도만큼은 바로잡아달라”고 부탁했다.
“가족들이 함께 외국여행을 할 때 항상 우리는 한국여권을 소지한 선친이 여권검사를 받을 때까지 공항대합실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한번은 ‘아버지, 왜 그렇게 불편하게 한국국적을 고집하시느냐’고 여쭈었더니 ‘태어난 조국을 어떻게 버릴 수 있느냐’고 하시던 말씀이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고교수의 조국은 미국.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습니까.
“물론 미국에서 태어난 내게 충성을 다해야 할 조국은 미국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우리 가족의 고향이고 큰 누님이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한국과 한국의 문화적 가치에 늘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때까지 한글을 공부했다는 그는 지금은 많이 잊어버려 한국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의 부인도 미국인 변호사. 다만 한국을 지’할 때는 영어대신 한국말로 ‘우리나라’라고 했다.
―인권차관보로 일하게 되면 한국과 미묘한 문제도 생길 수 있을텐데요.
“나는 정치가 아니라 원칙에 입각해 인권운동을 해왔습니다. 인권을 침해받은 사람을 위해서라면 민족과 인종 그리고 국가를 떠나 그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힘쓸 겁니다.”
―재미교포들이 미국의 높은 인종차별 벽때문에 고교수처럼 미국의 주류사회에 진출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얘기를 합니다. 어떻게 어려운 과정을 헤쳐나왔습니까.
“간단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미국은 기회의 나라입니다. 한국인이 미국으로 이민온 것은 대부분 45년 해방이후여서 이민의 역사가 짧습니다. 주류사회 진출에는 시간이 걸리지요. 하지만 젊은 교포세대를 보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훌륭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장래가 밝습니다. 나는 우리의 때가 오고 있다고 믿습니다.”
고교수는 “그동안 한국언론이 보여준 관심에 깊이 감동했다”면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그리고 인권운동가로서 인권현실과 정책에 대해 진실만을 얘기하는 차관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워싱턴〓홍은택특파원〉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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