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오래된 포부는 기자, 그 중에서도 종군기자였다. 포화를 뚫고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는 것이야말로 평소 존경해왔던 나폴레옹과 탐험가 난센을 합성해놓은 직업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특기는 발로 뛰는 것이었고 남의 약점 및 비리를 가만두지 못하는 심보를 갖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자신이야말로 기자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실제로 종군기자가 될 수 없다는 건 조국도 잘 알았다. 아쉽지만 사진기자만으로 만족하려 했다. 그러나 실력이 모자란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런 쪽은 다 특정한 대학 출신이 인맥을 형성하고 있어 조국처럼 신설 전문대 출신이 발붙일 곳은 없었다. 그는 진취적이기만 했지 물정도 모르고 주제도 몰랐다. 흔히 소견서 같은 데에 ‘뜻은 좋으나 노력을 요함’이라고 점잖게 표현되는 경우에 해당했다.
자기 표현을 빌리자면 조국은 그로 인해 한때 방황했다. 그러다 인연이 닿은 것이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였다. 조국은 다시 자신의 좌우명인 ‘인생은 승부다. 저지르고 보자!’는 말을 외치며 씩씩하게 사진작가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 그가 하는 일은 주로 외국에 나간 사진작가를 대신하여 빚 독촉을 받는 일이었다.
사진작가는 다큐멘터리 필름의 기획과 제작을 하는 ‘스튜디오 파인더’의 대표였다. 그런 한편 ‘도서출판 청석골’과 광고 대행사인 ‘송악 기획’, 그리고 이벤트회사 ‘평산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기도 했다. 그는 이 모든 심각한 사업체를 거느리는 데에 경리사원 한 명과 조수 한 명, 그리고 자신의 마당발과 사기술에 가까운 입심만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관심사는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협찬사의 돈을 끌어내 이 땅을 떠나는 것뿐이었다. 협찬을 받아내는 데 있어 그는 전통적이며 인간적인 방식을 썼다. 실무팀들과 함께 룸살롱과 카라오케에서 마구 돈을 뿌리고 웃돈을 얹어서 골프장 부킹을 해결했던 것이다. 협찬사 실무팀들에게 그의 존재는 진정한 예술가에다 호남아에다 봉이었다.
어쨌든 사진작가는 돈을 쥐자마자 떠나버렸다. 이제 조국이 등장할 차례였다. ‘너를 믿고 사업체를 완전히 맡기는 것이니 성의껏 잘 꾸려보라’는 사진작가의 진지한 당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사업체의 운영이란 사진작가가 떠난 바로 그날 아침부터 폭주하는 “오늘은 돈을 꼭 준다고 했단 말야!”라는 전화에 “배 째!” 라고 호방하게 응수하는 일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만두어버릴 수도 없었다. 몇 년 전 조국은 보름동안 사진작가의 아프리카 종단에 참여했었다. 사진작가 나름의 햇볕정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일단 맛을 본 셈이었다. ‘다음번에 데리고 가마’는 사진작가의 말을 매번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달리 먹고 살 방법을 찾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어버렸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사진작가의 호탕한 인생관에 물들어버린 탓도 있었다. 욕하면서 닮게 되는 이치처럼 조국은 곧잘 사진작가를 흉내냈다. 입만 열면 재벌과 언론이 눈 아래였고 낼 모레 들어올 돈은 물론 억 단위였으며 세계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었다. 그런 허풍으로 성공한 것은 협찬사 홍보과 미스 박과의 결혼뿐이었다. 또 한 가지 더 있다면 승주의 감탄이었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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