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내가 조국의 회사에 들른 건 순전히 나의 떨칠 수 없는 미덕이기도 한 의리 때문이었다. 한가해서는 절대 아니었다. 퇴직금도 타러 가야 되고 독립해 나간 선배들도 좀 만나보고, 어찌 보면 바쁘다고도 할 수 있는 몸이었다. 그러나 조국이 두어시간 간격으로 전화를 해대는 데에야 배길 수가 없었다. 운총의 꼴이 보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운총은 마치 깨끗이 씻어놓고 오랫동안 쓰지 못한 전기밥통 같았다. 무덤덤한 척 식탁 구석에 얌전히 놓여 있었지만 은근히 호구(糊口)를 상기시켜 숨통을 죄는 것이었다.
조국의 회사는 찾기 어렵기도 하고 임대료를 많이 받기도 어려울 듯한 외진 골목 안에 있었다. 낙원 떡집이라고 간판이 보일 거야, 거기 2층이야, 하던 설명대로 떡집 간판이 아니라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위치였다. 내가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돌아가자 떡집 여자와, 그 남편으로 보이는 ‘평화 세탁소’ 남자가 나란히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장물아비를 탐색하는 전당포 주인을 연상시켰다. 조국의 회사에 어떤 사람들이 드나드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 회사의 주업무가 빚쟁이 따돌리기라는 것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또 한 번 확인되었다. 손톱소제를 하던 경리 아가씨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앵무새처럼 말했다.
“지금 사장님 안 계세요. 다음에 오세요.”
경리의 뒤쪽 책상에 앉아 있던 조국이 넓적한 얼굴을 쳐들었다.
“잘 찾아왔네?”
“국제적인 쇼 비즈니스를 한다면서 떡집 이층이 뭐냐.”
“안 그래도 곧 피자집 이층으로 이사가려고.”
조국은 나를 사무실 안쪽의 칸막이 뒤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승주가 말쑥한 콤비 차림에 금목걸이를 한 사십대 초반 남자와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남자는 상체를 약간 흔드는 듯한 쾌활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국은 남자에게 나를 ‘도서출판 청석골’의 이사라고 우렁차게 소개했다. 남자가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는 걸 본 승주가 내 쪽을 향해 “참, 김 이사님 명함 떨어졌죠? 아침에 발주 들어갔어요”라고 거창하게 둘러댔지만 남자는 그런 데까지 신경쓰는 것 같지 않았다. 내 손을 굳게 잡은 다음, 눈을 내리깔고 입꼬리를 한 번 올리는 것이 아마 목소리를 깔기 위해 정신집중을 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뻬뜨루 최라고 불러주십시오.
직장생활 7년 동안 내가 받았던 명함은 천 장 가까이 되었다. 명함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재생종이인가 비닐 코팅지를 썼는가, 금박을 넣은 화려하고 조잡한 디자인인가 세련되고 단순한 디자인인가, 직함을 수없이 나열해 놓았는가 간단명료하게 연락처만 적어놓았는가, 영문자 표기의 철자 중 빠뜨린 게 있는가 없는가 따위를 살펴보면 명함 주인의 성격과 정체를 눈치챌 수 있는 것이다. 뻬뜨루 최의 명함은 짐작대로 약간 크고 뻣뻣한 전형적인 명함용지에 여섯 개나 되는 직함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브라질 한인 태권도 신문 발행인이라는 직함도 보였다. 물어보나마나 창간 준비중일 것이다.
<글:은희경>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