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도처에서 ‘고비용 저효율’이 문제가 되는 가운데 공리적 시장원리가 최선의 사회조직방안으로 대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는 시장이 아니다’는 정명은 유효하다. 공감 윤리 이념 믿음 등을 이유로 자신의 편익보다 타자의 복리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기 때문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이는 곧 완력보다 큰 지식교양의 힘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특히 “믿음을 통해 앎에 이르게 되었다”는 한 중세 철학자의 말처럼 때때로 믿음에 근거한 종교적 권능은 주지적(主知的)힘을 압도하기도 한다.
▼세속 어지럽힌 승려들▼
신앙적 힘의 원천은 한마디로 권세 금력 명예 등의 세속적 가치를 초월한 해탈의 경지에서 출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세속의 업에 오염된 종교는 결코 온전한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 해마다 연말 이때쯤이면 각계 종교 지도자들의 신년 메시지가 신문지상에 보도되곤 한다. 그중에서도 종파를 불문한 많은 국민이 고도의 상징어법을 구사하는 알쏭달쏭한 법어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중 하나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 특유의 성찰성 포용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세속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크게 현세적 고난에 대한 위안으로서의 보상적 기능과 현세적 영화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정당화 기능으로 양분할 수 있다. ‘천국이 가난한 것임’을 설파하는 서구 기독교 전통과 달리 기본적으로 부귀영화에 대한 회의에서 출원한 불교사상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천착하는 ‘행복의 신정론(神正論)’으로서 그것은 보상이나 구원 대신 탈속과 해탈로서 특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세속적 욕망을 가장 멀리해야 할 불교 교단이 총무원장이라는 행정적 대표자의 선출문제를 놓고 격돌하여 폭력사태, 경찰 투입, 자해극, 부상자 속출 등 상처투성이의 종교다툼을 벌였다는 것은 불살생 비폭력의 자비를 본령으로 하는 근본 가르침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법적 공방까지 예견되는 이번 조계종 사태는 그 연원이 80년대 신군부 치하의 법난, 더 멀리는 50년대 ‘정화불사’로까지 소급되는 뿌리깊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발단은 같은 문중에 속한 사형제(師兄弟)들간의 내분이라는 점에서, 종단개혁이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교리나 선에 관한 논쟁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더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계는 잿밥싸움이나 종권과 직결된 추악한 모습을 보였다는 불교계에 대한 사회적 질타를 대다수 국민의 애정과 기대의 소산임을 통각하여, 더 이상 분규를 확대, 외연시키지 않도록 합리적 해결책을 마련하는데 진력해야 한다고 본다.
일차적으로는 종단의 무질서와 무능을 혁파할 수 있는 법 제도 인사 재정운영상의 부조리를 개선해야 하나, 더불어 종단은 승려들만의 단체가 아니므로 재가신자들의 폭넓은 참여를 통해 사부대중의 화합종단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원천적으로는 불타의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하는 수행자들의 의식회복이 동반되어야 한다. 묵은 잎을 다 떨어버려야 새싹이 돋는다는 대자연의 이법에 비견한 법정스님의 출가정신에 대한 강조는 실로 함의하는 바 크다.
▼출가정신으로 복귀를▼
기본적으로 신앙은 성직자와 무관한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을 바라보듯 성직자들의 면면을 통해 생활로서의 종교를 체득하게 되는 것이니 이번 사태의 당사자들은 종단의 대동화합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마음으로 살신성인해야 할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도 생존 당시 스님들의 싸움으로 법회를 열어 화합을 종용하였으나 다툼이 계속되자 은밀히 빠릴레이야까라는 숲에 은거해 코끼리와 사셨다고 한다.
그러나 훗날 수도자들이 용서를 빌자 그들에 대한 비난을 제어시킴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셨다고 한다. 모쪼록 깨달음의 종교인 우리 불교가 대오각성을 통해 해묵은 분쟁의 사슬을 벗어나, IMF 환란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위해 ‘위로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불교 본연의 자세로 거듭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김문조<고려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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