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60)

  • 입력 1998년 12월 27일 19시 38분


화적 (16)

그날 우리는 유난히 바빴다. 다른 날과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스스로 모든 것이 유능해서 그런 것이었다. 축하전화가 몇 통화밖에 없었으므로 조국은 전화기가 잘못 놓였냐고 미스 김에게 몇 번이나 물었다. 그날은 당연히 술집에 가기 편하게 퇴근시간도 앞당겨져 있었다.

막 사무실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사장 앞으로 팩스가 한 장 도착했다. 우리의 업무처리 능력이 그처럼 신속하지 않았더라면, 또 발신이 방송국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그날의 흥분을 최소한 다음날까지는 연장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읽었다. 세 사람이 돌려가며 몇 번이나 읽어보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우리 방송사는 이민 30주년 기념 브라질 쇼를 기획하여 모든 준비를 마쳤다. 출발을 3주 앞두고 있다. 평산 인터테인먼트에서 펠레를 초청한다는 기사를 봤는데 우리가 브라질에 갔을 때 미리 인터뷰를 따오고 싶다. 펠레에 대한 자료를 부탁한다.

그제서야 내 눈에 발신인이 뚜렷히 들어왔다. 방송국이 아니었다. 그 방송국의 특별사업부였다. 대기업이 계열사인 광고회사에서 광고를 제작해 역시 자기 소유인 신문사의 광고지면을 사고, 한편 그 신문에 모기업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가 실리는 것과 마찬가지 사이클이었다. 방송국에서 있는 사람, 있는 장비, 있는 이름 갖고는 소규모 기획사에서 할 일까지 다 긁어가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야? 브라질 쇼를 자기들이 한다는 거야? 우리 일을?”

승주와 조국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나는 담배를 세 대나 피웠다.

사건의 전모를 이내 밝혀졌다. 김부식의 기사에 파렴치한 공인으로 낙인찍힌 가수가 사단이었다. 그는 쇼 피디에게 그놈의 기획사라면 이가 갈린다고 하소연을 했다. 쇼 피디는 브라질 쇼 아이템이 괜찮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특별사업부의 친구에게 귀띔했다. 프로급 기획회사이니 ‘평산 인터테인먼트’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기획서나 연예인 섭외, 쇼 콘티까지 한순간에 나왔다. 브라질 교민회에 방송사 이름으로 연락이 취해졌고 극장이니 장비니 모든 준비가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의리있는 뻬뜨루 최뿐이었다. 우리는 뻬뜨루 최가 빨리 출장에서 돌아와 사태를 해결하고 협찬금의 일부를 송금해줄 것만을 기다렸다. 나의 초조감은 약간 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뻬뜨루 최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 역시 한순간이었다. 그는 애초에 브라질 쇼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협찬도 말뿐이었다. 우리를 초청한 것은 브라질 항공사에 접촉하여 자기가 수입한 쌍마자동차의 자동차를 계열사에 납품하려는 것이었다. 김태성 사장이 쌍마자동차에 손이 닿도록 중재를 서주었고 그 과정에서 브라질 쇼를 미끼 삼아 우리를 이용했다. 브라질에서 기자요 피디로 멋지게 사기를 쳐주는 것으로 우리 역할은 끝난 것이었다. 우리에게 보낸 비행기표도 물론 브라질 항공사에서 얻어낸 것이었다. 손해배상을 하라고 소리치는 조국에게 뻬뜨루 최는 쇼도 진행하겠다고 자기를 사기쳤다며 비행기표 값과 관광비를 물어내라고 맞섰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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