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국과 승주의 말을 들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참, 졸업 20주년 기념이라고 동창회 했을 때 너네들 다 안 왔었지? 야, 20년만에 가보니까 진짜 웃기더라. 담벼락이 왜 그렇게 낮고 교실은 무슨 사과궤짝 같애. 변소도 원, 그 옹색한 곳에서 우람한 물건들이 어떻게 큰 일들을 치렀는지 몰라. 변소에서 누가 장사 치렀냐? 어쨌든 참 한심하더라. 그런 걸 보고서 추억 어쩌구 하는 놈들은 혓바닥이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근데 우리 동창 중에 벌써 죽은 애들이 이십 명이나 되더라. 암으로 죽은 놈, 뭐 교통사고, 자살한 놈도 있어. 사업하다가 부도난 모양인데, 왜 사업이란 게 아랫돌 빼서 윗돌 막는 거 아니냐. 더 이상 그 장난도 칠 수가 없게 되니까 약을 마셔버린 모양이더라구. 그 자식도 참. 사는 게 다 그렇지. 저만 뭐가 그리 힘들다고, 때 되면 어련히 죽을걸 힘들게 자살까지 하냐. 동창회에서 어떤 놈이 그러던데 우리가 뭐, 베이비붐 세대라면서?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왔다고 하던데 나도 몰랐어. 그러고보니 우리는 참 여러 가지로 장한 인생이야. 그럼 잘 태어났지. 유엔데이가 내 생일이라 늘 학교 안 가고 놀았는데, 참, 우리가 유엔 가입했던가? 어제 서림이가 물어보던데 알아야 말이지. 자식 새끼 얘기는 하지 말라니까. 그나저나 너 두환이 아들놈 안 봤지? 그놈 인물감으로 생겼더라. 이름이 장충이던가? 눈꼬리가 올라간 게 보통 도적놈 눈이 아니야. 장길산은 못 돼도 장길산 애비 정도는 될 거 같더라니까. 야, 조국! 방귀 좀 가려가면서 뀌어라. 안 돼. 성능이 좋아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터지거든. 소중한 순간에는 잠시 꺼두어도 좋아, 임마!
앉아 있자니 바람이 제법 찼다. 빨갛게 상기된 승주의 얼굴은 이마가 벗겨지기 시작하고 눈시울이 쳐져 미소년의 퇴락을 알리고 있었다. 언 귓불을 비벼가며 쭈그려 앉아 소주 한 병을 새로 따고 있는 조국의 옆모습에도 세월은 느껴졌다. 저 다리로 어떻게 살아왔나 싶게 다리가 짧기도 했다. 그것을 보며 나는 마치 진지한 사람의 책무라는 듯이 문득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지식인들은 언제나 자기의 시대를 위기라고 말해왔고 애국자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시대를 국난이라고 했다. 그들처럼 간뇌도지를 부르짖으며 간과 뇌수로 바닥을 칠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우리는 그런 인생이 아니다. 그래서 잘못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그들대로 살고 우리는 우리 식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운전을 하다가 산 속에서 기름이 떨어져간다고 하자. 그들이라면 남은 연료로 연비를 계산하거나 지도를 펴놓고 주행거리를 줄일 궁리를 하거나 혹은 그 자리에서 도움을 기다리며 기름을 비축해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주유소를 찾아 돌아다닐 뿐이다. 차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차안에 누워 있다가 굶어죽거나 얼어죽으면 그만이다. 오리털 파카에 오리털이 몇 올밖에 안 들어 있다고 불평하면서.
“춥다. 일어나자.”
“그래. 두환이한테 술이나 한 잔씩 더 부어주자. 할 말 있으면 한마디씩 하고.”
“그럼 내가 먼저.”
조국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두환아, 편히 쉬어라.”
승주가 받았다.
“소희한테 전해라. 내 영원한 첫사랑은 소희뿐이라고.”
“끝.”
내 목소리는 추위 때문에 약간 갈라져서 나왔다.
―끝―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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