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3)

  • 입력 1999년 1월 3일 19시 18분


그가 두 손으로 나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하나님 여기 한 형제가 십 팔년의 형기를 마치고 이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동안 여기서 있었던 모든 일들 가슴 속에 묻어 버리게 하여 주옵시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보살펴 주신 것처럼 세상에 돌아가서도 다시 보살펴 주셔서 오 선생님의 앞 날에 희망과 기쁨이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제는 작은 것에 감사할줄 아는 겸손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여기 남아있는 저희들도 잊지않게 하여 줍소서.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나는 책상 위에서 두툼한 옥편을 꺼내어 책 갈피를 들쳤다. 숨겨둔 나의 사유재산인 손바닥만한 거울을 꺼냈다. 독거방에는 자살을 한다고 해서 유리 조각이나 줄이나 날카로운 쇠붙이를 소유할 수 없었다. 나는 그 거울을 미결 감방의 소지에게서 범치기로 얻었다. 라면을 주었는지 카스텔라를 주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두꺼운 책 갈피마다에는 그런 내 보물들이 숨겨져 있었다. 성경 책에는 깡통 뚜껑을 변소의 시멘트 벽에 갈아서 만든 손가락만한 칼이 끼워져 있었다. 그것으로 과일을 깎거나 김치를 잘라 먹었다. 편지봉투가 꽂힌 종이 벽걸이에는 제일 뒤의 봉투 안에 머리 빗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형광등을 향하여 정면으로 얼굴을 쳐들고 거울을 갖다 댔다. 거울 속에 오십대의 사내가 쓸쓸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귀 밑에서부터 흰 머리가 머리 윗쪽으로 번져 가고 있었고 입가에는 주름이 잡혔고 미간과 눈가에도 잔주름이 보였다. 나는 저 거울에 비친 얼굴 뒤에 컴컴하게 보이는 어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둠 뒤편에는 무엇이 있을건가. 과연 바깥 세상이란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시간이 내 생애의 무엇을 잘라냈는지 나는 되돌이킬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를 빗었다. 퇴색한 실 같은 머리카락이 맥없이 옆으로 넘어졌다. 머리카락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더욱 하얗게 번쩍였다.

철문이 열리고 쇠빗장을 끼우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고 구둣발 소리는 아래 층 복도를 지나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책과 거울과 빗을 제 자리에 넣어 두고 공손하게 매트리스 방석 위에 앉았다.

다시 이층 특사의 철창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쇠빗장 따는 소리와 철창이 쇠기둥에 부딪치는 소리. 담당 근무자의 인원 보고 소리가 들리고나서 당직주임의 발자국 소리는 작아진다. 그는 아마 감방 복도에 길게 깔린 매트 위를 걷고 있을 것이다. 주임은 조용히 내 방 앞에 다가와 두어뼘되는 시찰구의 창살 사이로 얼굴을 나타냈다. 비닐로 막혀 있어서 그의 얼굴 윤곽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1444번 오늘 나가지요?

그렇습니다.

주임의 모자 챙이 아래로 향하고나서 짧막하게 말했다.

네 시가 넘었는데… 문 따지.

매일 아침 운동시간마다 들리던 투명한 쇳소리가 나면서 방문이 덜컥 열렸다. 복도 쪽의 공간이 비좁은 감방 안으로 한꺼번에 밀려 들어오는 듯했다.

짐 가지고 나와요.

예?

나는 엉거주춤한 채로 그에게 되물었다.

집에 가야지.

집이오? 아, 네….

나는 머리맡에 얌전하게 세워둔 보따리 두 개를 들었다. 그리고 방문 바로 위의 선반에 깨끗이 씻어둔 흰 고무신을 꺼내어 문 밖 복도에 내놓고 발을 내밀었다. 나는 두 발로 감방 바깥에 나와 섰다. 내 방은 끝에서 두 번째였는데 방을 한칸씩띄어서나같은정치범들이수감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잠들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 줄을 알고 있었다. 내가 복도의 맞은편 끝으로 걸어가려고 했을 때 주임이 등 뒤에서 말했다.

이쪽으로.

<글:황석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