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제일은행 매각 이후

  • 입력 1999년 1월 3일 19시 18분


제일은행이 미국 금융사에 팔려나가는 모습을 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1년전 험난했던 환란의 파고속에 일찌감치 매각이 예고되긴 했지만 한 시대 우리 금융사에 ‘제일’ 잘 나가던 은행이 막상 외국자본에 넘겨지는 현실은 냉혹감마저 느끼게 한다. 한편으로는 그나마 큰 부실덩이를 정리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외신인도가 개선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해 본다.

이번 정부의 제일은행 매각조건은 일반인들의 눈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부실채권을 모두 정부가 인수하고 그것도 모자라 앞으로 2년간 발생하는 부실도 떠맡기로 한 것이 그 중 하나다. 4조원 이상 최대 10조원까지의 국민부담을 퍼부어 깨끗하게 정리될 은행을 뉴브리지측은 단돈 6천여억원에 인수했다. 물론 전문적 시각으로 볼 때 복잡한 속사정은 있겠지만 정부가 스스로 설정한 매각시한에 얽매여 흥정에 밀리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다.

뉴브리지의 경영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정부는 정부가 갖고 있는 제일은행주식 49% 지분의 의결권을 포기하기로 했다. 특별대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내 여타 은행들에 대한 유무형의 정부영향력도 형평성 차원에서 재고되어야 한다. 본란이 누차 강조하지만 아무리 외자도입이 급해도 국내업계가 역차별을 당해서는 안된다. 또다른 걱정거리는 이 은행과 주거래관계를 맺어 온 국내기업들이 혹 자금경색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외국경영진의 잣대로 평가될 때 과연 얼마나 많은 국내기업들이 온전히 대출을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 은행을 통해 국내 기업들의 경영정보가 해외로 유출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계가 필요하다. 소액주주들의 손실과 인력조정도 앞으로 겪어야 할 과제다.

비싼 대가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이번 제일은행 매각은 긍정적 측면도 없지 않다. 우선 외국의 선진 은행경영 기법이 도입돼 국내 금융기관에 자극과 교훈을 줄 수 있다. 이 은행에 대적하기 위해 여타 국내은행들이 벌일 건설적 경쟁상황이 기대된다. 선진기법을 가진 주거래은행이 제대로만 하면 해당기업들의 경영수준이 향상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특히 기대되는 것은 최근 더욱 심해진 정부의 관치금융 악습이 간접적으로 제어될 수 있다는 점이다. 환란의 직접적 원인이었으면서도 아직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이 관치금융이다. 부실채권이 적고 정부의 간섭을 덜 받는 후발은행들이 환란속에서도 높은 수익을 남길 수 있었던 사실을 정부는 유념해야 한다. 차제에 관치금융이 사라질 수만 있다면 제일은행의 매각조건은 중요하지 않다. 정부와 국내 은행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은행의 자율경영체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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