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잠깐 앉아 계세요. 아직 시장하지 않으시죠?
괜찮다. 원래 저 안에서도 아침은 안먹었어.
어머니가 며칠 전부터 준비를 하셨거든요. 식사는 집에 가서 드시기루 하구요. 뭐 음료수든 차든 마시겠어요?
나는 주위의 탁자에서 뭔가 마시거나 먹고 있는 사람들을 멍청히 둘러보았다.
저걸 먹자.
뭐요, 핫도그요 아니면 핫바요…?
아니 아이스크림.
나는 어느 젊은 여자가 혀를 조금씩만 빼어 끝에 꼬리처럼 뾰족히 사리를 튼 아이스크림의 주변을 아껴서 핥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조카는 양손에 커피 한 잔과 아이스크림을 쳐들고 돌아왔다.
참 이런 것 드신지 오래 되셨죠?
한 십 일년쯤 됐나….
어디서요?
응 이감 갈 때 교도관이 한번 사줬지.
나는 아이스크림을 받아 저 애가 하던 식으로 혀를 조금만 내밀고 꼬리 부분을 핥았다. 입 안에서 차가운 액체로 녹아 내리면서 무슨 그림 같이 열린 창가에 나부끼는 작은 꽃이 프린트 된 포플린 커튼이며, 창 넘어로 불어 들어오는 아카시아 꽃의 향내며, 잉잉거리며 유리창을 오르내리는 꿀벌의 나른한 날개짓 소리며, 하는 것들이 지나갔다. 거기 덧붙여서 옛날 전쟁 나고나서 피난 때 장사 나간 어머니가 머리맡에 두고 간 미제 젤리의 맛이 지나갔다. 빨강 노랑 파랑 보라 초록 그리고 무엇 보다도 검정색 젤리의 그 이국적이고 독특한 향내. 그건 무슨 풀로 향기를 냈을까. 나는 이것이 무엇인줄 잘 알면서도 세상의 모든 물건이 이제는 다 그쪽으로 간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워 하면서.
날이 차츰 밝아오고 있었다. 하늘은 벌써 부옇게 바래고 눈은 그쳤다. 고속도로의 가로등도 꺼졌다. 다만 가고 오는 자동차의 앞 등만이 짐승의 눈처럼 밝혀 있다. 이제 나는 옛 산천의 모습으로 서울 근방에 가까이 다가온 것을 안다. 새벽 여명이 차츰 깨어가듯 나의 감각도 천천히주변사물에익숙해지기시작했다.나는 그제서야 점퍼의 가슴께를 더듬어 지갑을 꺼냈다.
지갑의 거죽을 맹인의 점자 읽기처럼 손가락 끝으로 쓸면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래 당시에는 어머니가 살아 계셨지. 부적에는 어머니의 조바심과 눈물이 묻어 있었을 게다. 과학하는 자가 부적이 무엇이냐고 차마 짜증내며 버리지 못한 것은 어머니는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제는 그것들을 버릴까부다. 나는 부적을 꺼내어 엄지와 검지로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집어 넣는다. 반 명함판 사진이 또 있다는 걸 나는 잘 안다. 손가락 끝으로 맨 밑바닥에 찰싹 붙어있는 사진을 집어냈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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