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드높은 건물들 사이에서 나는 조카의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정근이와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십오층의 현관 문에 이르러 벨을 누르자마자 누님이 뛰어나왔다. 자형도 그 뒤에 서있었고. 그네가 내 목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구 네가 우리집엘 오는 날이 다 있다니, 이게 웬 일이냐.
누님을 만난 것은 이제 겨우 일년 전이다. 누님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교대를 한 셈이었는데 근년에 들어서는 일년에 한 두 번쯤 면회를 다녔다. 누님도 자형도 대학 교수가 직업이어서 방학 때나 명절 때 아니면 지방으로 나다니기 어려웠을 것이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이모와 사촌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 제 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지가 않았다. 건성으로 웃고 인사를 건네고 했지만 그들의 말 소리가 웅웅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말이 되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형이 내 얼굴을 보고 눈치를 챈 것처럼 물었다.
피곤하냐? 좀 쉬어라.
밥 안먹고?
누님이 그랬지만 정근이가 말했다.
삼촌 저기서두 아침 안드셨대요.
그래 그럼 어여 눈 좀 붙이구 일어나렴.
간밤에 잠이 왔겠어? 어서 쉬어.
누님이 나를 정근이 방에 안내해서 그의 침대에 눕도록 했다. 그네는 커튼을 치고 조용히 문을 닫아 주었다. 방안은 내가 살던 방에 비하면 너무 넓어서 침대 옆의 빈 공간이 어쩐지 두려웠다. 나는 벽을 향하여 돌아누웠다.
시멘트의 날벽이 아닌 벽지를 바른 벽이다. 벽은 나에게 가장 익숙한 사물인 셈이었다. 그 벽 가운데 나는 온갖 그림들을 떠올렸다. 나는 특사 감방의 벽 사방에 보이는 얼룩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또한 천장에도 얼룩들이 있었다. 어릴 때 물가 풀밭에 누워 하늘에 피어 오른 여름 날의 뭉게구름들이 바람으로 이리저리 뭉치고 흩어지는 모양을 보며 그 형상들로 이야기를 짓던 일이 생각나곤 했다.
가끔 몽정을 했다. 얼굴을 알 수 없는 여자들이 다녀갔다. 어느 달 밝은 밤에 어슴푸레 잠에서 깨어 실눈으로 바라보면 생선처럼 물기 묻은 매끈한 몸매의 여인이 오똑 서서 누운 나를 내려다 보았다. 그네는 어디서 찾아온 걸까. 여기서 이 황폐한 창고에서 나가겠다고 오불꼬불한 인적없는 복도를 헤매고 다니다가 꼭 특사 아래층 복도처럼 생긴 곳으로 돌아오게 되곤 하였다. 계단 모퉁이에 무슨 버스 터미널의 매점 같은 게 보이고 십대의 계집아이들이 재깔대며 뭔가를 먹고들 있었다. 내가 다가갔는데도 그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매점 안쪽에 주인인듯한 사십대의 아줌마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어둠 그대로였다. 내가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어디냐고 물으면 아줌마는 복도가 온통 울리도록 깔깔깔 웃고는, 우리하구 더 좀 살다 가지 왜 벌써 가려구 그래.
하던 것이다. 그 얼굴 없는 아줌마가 특사의 임자였을 게다. 그런데 아는 이의 모습은 좀체로 나타나지 않았다. 보고싶어 잠들기 전에 골똘히 생각하다 자도 쉽사리 보이질 않았다.
나는 이 깨끗한 방의 벽에 아무런 그림도 이야기도 짓지 못했다.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 솟구치듯이 울음이 북받쳐 올라왔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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