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임연철/작곡가 故손목인

  • 입력 1999년 1월 11일 19시 25분


▽방송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일제시대에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가극단을 따라 다니다 레코드사 사장의 눈에 띄거나 가요콩쿠르에 입상하는 길밖에 없었다. 삼천리가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다 OK레코드사에 발탁된 이난영(李蘭影)은 전자의 대표적 경우에 해당한다. 후자의 경우로는 1933년 동아일보 후원으로 콜럼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전국신인가수선발대회에서 입상한 고복수(高福壽)가 대표적이다.

▽이난영이나 고복수는 각각 다른 경로로 가수가 되긴 했지만 두 사람에게 당시 일본 유학에서 막 돌아온 약관의 신예작곡가 손목인(孫牧人)의 존재는 구세주와 같은 것이었다. OK레코드에서 여러 노래를 취입했으나 히트곡이 없던 이난영에게 손목인이 작곡해준 ‘목포의 눈물’은 그 후 이난영의 모든 것이 되고 말았다. 고복수에게 작곡해준 ‘타향살이’ 역시 그의 대표곡이자 국민애창가요가 되었다.

▽두 노래 이외에도 김정구의 히트곡 ‘바다의 교향시’를 비롯해 김백희가 부른 ‘아내의 노래’, 박단마의 ‘슈샤인 보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히트곡을 작곡한 손목인씨가 9일 타계했다. 한국가요계의 1세대 중에서도 ‘거목’을 잃은 느낌이다. 베레모를 쓴 채 아코디언 연주를 하던 고인의 모습을 기억하는 올드 팬들의 아쉬움은 더욱 클 것이다.

▽비록 그의 노래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자주 불리지 않지만 한민족에게는 시공(時空)을 초월해 계속 전해질 것이 확실하다. ‘타향살이’만 해도 실향민이나 해외동포는 물론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현대인에게는 남의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때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해 고인 자신이 타향살이를 하기도 했으나 이제 조국에서 영면하며 영혼이 안주하기를 빈다.

임연철<논설위원〉ynch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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