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2)

  • 입력 1999년 1월 13일 19시 18분


길이 여러 갈래가 나왔는데 무조건 가운데의 큰 길로 걸어 나갔다. 거기는 이미 대학 구내였고 교문에서부터 캠퍼스로 들어오는 중앙로였던 모양이다. 몇 걸음 못가서 잘못 들어왔다고 생각했지만 되돌아 설 수는 없었다. 등교하는 학생들의 인파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나는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 꼴이 되어 버렸다. 가끔씩 어깨를 부딪치기도 하고 마주오는 사람을 피하려다가 다른 사람의 진행을 방해하기도 해서 나는 곧 여러 사람의 눈에 띄게 되었다. 학생들은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기도 하고 멀찍이서 피해 가기도 했다. 꼭 술에 취한 것만 같았다. 멀리 교문이 보였고 거기까지만 당도하면 이제 고통은 끝난다 생각하고 천천히 일부러 서두르지 않고 한걸음씩 내디뎠다.

어지럽고 땀이 났다. 교문을 나서자마자 큰 길이었다. 자동차들이 속력을 내어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갔고 버스나 트럭들이 지나갈 땐 나를 덮쳐 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가로수를 붙잡고 한참이나 섰다가 쭈그려 앉고 말았다.

속이 메슥거려서 물기를 조금 뱉어냈다. 조금 걷다가는 쉬고 다시 가로수를 차례로 헤아리면서 걸었다. 식당이 있는 번화한 곳에 당도해서는 도저히 약속 장소를 찾을 엄두가 나질 않아 육교의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서 조카가 나를 발견해 주기를 기다렸다.

삼촌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정근이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음 조금 어지러워서….

외출이 아직 무리인가 보죠.

우리는 누님이 기다리던 식당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구석 자리에 가 앉자 조금 진정이 되었다.

점심을 마치고 누님은 나를 조용한 뒷산 오솔길로 해서 병원까지 바래다 주기로 했다. 걸음이 빠른 정근이는 앞장서서 저만큼 갔다가 되돌아와 제 어머니를 한번 쳐다보고는 내게 말했다.

저 사무실로 돌아가야겠어요. 삼촌 이따 저녁에 뵙지요.

그래 그래 바쁜데 어서 가 봐라.

길 좌우에는 키 큰 잡목들이 아직도 마른 잎새를 달고 빽빽히 늘어섰고 가끔씩 자동차가 천천히 지나갔다. 숲의 공기는 상쾌하게 맑고 차가웠다.

까치 한 쌍이 즐겁게 우짖으며 나뭇가지 사이로 오르내렸다. 누님이 말했다.

너 아무래두 어디 시골 가서 좀 쉬어야겠다.

시골이요…?

나는 감옥의 내 방과 범치기로 만든 그 가난한 사유물밖엔 아무 것도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다.

저 안에서두 한선생 소식 들은 적 없지?

처음에는 누님이 누구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한선생… 누구 말예요?

한, 윤, 희. 잊어버렸니?

가슴이 얼어 붙듯이 움찔하더니 따뜻한 물이 서서히 발 끝에서 차오를 때처럼 팔 다리가 풀려가는 느낌이었다. 아, 나는 잊고 있었던게 아니다. 다만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슨 나쁜 소식은 아닌가 하여.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그네의 마지막 편지를 영치당한 것도 벌써 십 일년 전의 일이 아닌가.

한선생 잘 알고 있습니다. 충청도로 옮기고나선 소식이 끊겼어요.

누님은 잠깐 망설이는 눈치더니 나를 살피며 나직하게 물었다.

너 그 사람… 좋아했니?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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