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2)

  • 입력 1999년 1월 25일 19시 16분


우리는 불을 끄고 나란히 누워서 느티나무 잎새가 내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남수도 자꾸만 돌아눕는 것이 잠이 오지않는 눈치였다.

형님, 첨에 지하신문을 뿌리고 잡혔을 때 조사실에서 수갑 차고 얻어 맞을적에 말이요. 정보부서 어뜬 높은 놈이 왔습디다. 이 자가 내가 쓴 유인물을 척 내밀더니 나보고 한번 읽어보래. 그래서 더듬더듬 읽었더니 내 뺨때기를 후려치더만 야 이새끼야 우리 아들두 일류대학 다니는데 너만큼 몰라서 가만 있는중 알아, 그라고 권총을 빼서 이마에 갖다 댑디다. 총 구멍이 어찌나 크게 보이던지 다리에 맥아리가 쭈욱 빠지고 나는 저절로 주루루 무릎을 꿇고 말았소. 뒤에 그 생각하면 늘 창피합디다.

남수는 일어나 앉았다. 나도 어둠 속을 더듬어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왜 잠이 안오냐?

남수는 퇴창문을 벌컥 열더니 컴컴한 담장가에서 가지를 흔들어대는 느티나무를 내다보았다.

나는 인제 확실하게 싸우고 싶어라우. 뜨뜻미지근한 건 오늘부터 끝이요.

사람이 많이 다녀야 길이 생긴다구 그러지 않데?

길 먼저 가는 사람도 있소.

새벽에 남수는 찌그러진 가방 하나 달랑 메고 그의 초라한 속옷가지들과 빨지못한 양말 몇짝을 담고 서울의 도피처로 떠났다. 남수를 배웅하러 새벽 길을 걷는데 울 안의 동네 개들이 사방에서 짖었지. 그는 내게 쪽지 한 장을 남겼다. 당에서의 모든 직책과 권력을 버리고 볼리비아로 떠나던 체가 피델에게 쓴 마지막 편지였다. 그리고 뒷장에는 체가 그의 어린 것들에게 보내는 미래에 대한 편지.

형님 저 옆에도 기다리는 아그들이 많어라우.

건이가 먼저 남수의 묘를 떠나면서 말했다. 나는 다시 기순이와 상운이의 영혼 결혼을 시킨 합장 묘 앞을 스쳐간다.

상운이 형은 저 아래 오일팔 묘역으로 제도화 됐어라우. 여그는 가묘요. 그러니 아래서 다시 뵙시다.

우리는 다른 여러 이름들과 인사를 건넨다. 아래 오일팔 묘역으로 내려와 상운이 영준이 최근에 떠난 철영이까지. 고문 끝에 머리를 다쳐 십 구년 동안을 나와는 다르게 정신병원에 유폐 되었던 철영이. 그는 언제나 당대에 살았다. 그의 실성은 기억의 멈춤 때문이었다. 그는 고생하는 아내가 찾아가 면회할 적마다 죽은 사람들의 안부를 묻고 오늘은 도청 앞 상황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정신병동의 독방에 있던 최후의 시민군이었다. 대리석과 상징물로 치장된 묘역은 또 다른 굴레처럼 보였다. 저 남수가 누웠던 오손도손 잡다하게 모여있는 동네는 그야말로 옛날의 공동묘지여서 마른 풀조차 포근해 보였다.

저녁답에 건이가 나를 데리고 시내로 나갔다. 중심가의 풍경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 한정식 집에 사람들이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황하고 형식적이어서 별로 뚜렷한 기억은 나질 않는다. 삼 차까지 가는 동안에 그렇게 사양을 했건만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출옥하고 첫 술자리라 조심을 했는데도 아마 이 차의 막판에 누군가가 깽판을 놓았거나 싸움이 일어났던 듯 싶다. 그래서 술잔을 마구 집어다 마시지 않았을까.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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