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李在哲·50)목사. 88년 52명의 신도와 함께 서울 강남YMCA에 ‘주님의 교회’를 세운 뒤 예배당도 짓지 않고 교회를 이끌어온 사람. 이후 신도가 크게 늘었으나 여전히 건물을 짓지 않고 정신여고에 강당을 무상으로 지어준 뒤 그곳에서 ‘더부살이’생활을 하면서도 헌금의 50%를 이웃돕기에 사용한 목회자. 목회 초기부터 “10년 동안만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떠나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실천한 사람이다.
이목사가 떠날 무렵 ‘주님의 교회’는 신도수가 3천명이 넘는 큰 교회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미련도 갖지 않고 신도수 1백명 남짓의 스위스 제네바 한인교회로 떠났다.
대부분의 국내 목회자는 교회를 일으킨 후 70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다 원로목사로 봉직한다. 종교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시작할 때’는 아름다웠지만 ‘물러날 때’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목사의 퇴임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의 엄격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는 교회를 맡은 지 6년이 조금 지난 95년부터 당회에 후임목사를 청빙하자는 안건을 정식으로 올렸다. 교인들이 “아직 4년이나 남았다”며 만류하자 아예 직접 후임목사 물색에 나섰다. 그리고 자신이 해 오던 일을 부목사들에게 하나하나 넘겨줬다.
“때가 되면 물러나는 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나무는 새순이 돋고 가지가 굵어지고 그러다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요. 하지만 때가 되면 낙엽이 돼 또 다른 생명을 위해 스스로 썩어갑니다. 태양은 한낮에 온 세상을 밝히지만 저녁에는 서산으로 자신의 몸을 감추며 사라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마음속의 ‘욕심’을 버리고 역할을 다했을 때 물러나는 것이 순리라고 믿습니다.”
이목사의 설명이다.물론 그의 퇴임은 순탄치 않았다.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운영되며 가족같은 정으로 뭉치는 한국 교회의 특성상 교인들이 이목사를 고분고분 보내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
수많은 교인이 퇴임을 재고하라며 설득했다. 하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퇴임 이후에도 이목사는 철저히 교회와 자신을 단절시켰다. 우선 국내에 남게 된 가족 모두가 교회를 옮겼다. 교회가 가족에게 제공하기로한 약간의 사례금도 거절했다. 한국을 떠날 때 10년간 동고동락(同苦同樂)한 교인들의 ‘마지막 배웅’도 매몰차게 뿌리쳤다. 후임 목사가 정식으로 부임한 지난해 12월까지 신도들의 안부편지에도 답장하지 않았다.
“나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주님의 교회’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소임을 마치고 떠났고 ‘주님의 교회’는 나보다 훨씬 훌륭한 새 목사님과 더불어 새로운 일을 해 나가야 합니다. 나는 철저히 잊혀져야 할 사람입니다.”
이목사는 3년으로 예정된 스위스에서의 목회를 마치더라도 서울에서 목회를 다시 할 계획은 없다고 말한다.
만년설이 하얗게 덮인 알프스산을 올려다보며 사는 요즘의 심경을 그는 이렇게 전한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히지 말라/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기에).’
그가 한국을 떠나기 전 스스로 수백번 되새겼다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의 시다. 10년간 눈덮인 들판을 정돈된 발걸음으로 걸어온 이목사는 한국 교회에 ‘아름다운 퇴장’이라는 발자국을 남기고 갔다.
〈이완배기자〉roryre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