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8월 말레이시아 바쿤댐 건설지인 사라와크주를 방문했을 때 만난 원주민.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인 나이 지긋한 그 원주민의 말은 그의 한숨과 함께 지금 내 수첩에 남아 있다.
그해 7월부터 6개월 동안 나는 사회개발문제연구단체 ‘포커스 온 더 글로벌 사우스’(제삼세계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 동남아의 많은 사람을 만났다.
사무실은 태국 방콕에 있었지만 업무는 국경을 넘어 동남아지역의 개발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조사 연구하는 것이었다.물론 정부당국자 고발이나 시위같은 것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현장조사를 통해 운동을 지원하고 한차원 높게 발전시키는 데 보람을 느꼈다.
이 단체의 상근자는 7명. 태국 인도 필리핀 호주 등 국적도 다양했다. 점심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문화교류하는 여유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출장이 걸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조사대상 지역이나 단체가 대부분 그 나라 정부를 상대로 싸우는 ‘약자’이기 때문이다.
사라와크주를 방문했을 때도 처음부터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가방 속의 바쿤댐 관련자료가 사라와크공항 세관에 발각되면 그 즉시 쫓겨나기 때문이었다.
각국 환경운동가들의 출입을 막기 위한 감시도 심했다. 결국 현장에는 가보지 못한 채 사라와크주 제2의 도시 시부의 한 민간단체 사무실에서 이주 대상 원주민들을 만났다.
말레이시아 페라크주 부킷메라에서는 일본 미쓰비시의 자회사인 ARE공장이 토해 놓은 방사성 폐기물 때문에 고통으로 신음하는 주민들의 눈물을 보았다.
백혈병에 걸려 고통과 피곤함으로 낮에도 하염없이 잠만 자는 12세 소년의 얼굴이 기억에 생생하다.
방콕의 빈민문제단체 ‘인간정주(定住)재단’도 인상깊었다.
간판조차 걸려 있지 않은 사무실이었지만 급속한 도시화과정에서 보금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 도시빈민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동남아지역의 개발문제는 한국이 겪었던 문제와 닮았다. 더욱이 한국기업이 이 지역에 많이 진출해 있다. 한국은 열대림 목재 수입국 세계 3위로 우리의 소비 자체가 이곳의 환경과 연결돼 있기도 하다.
태국에서의 나의 체험은 한국시민사회도 그들에게 책임을 느껴야 하고 필요하다면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자본과 통신뿐만 아니라 시민운동의 국제연대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를 새삼스레 깨달은 계기도 됐다.
남상민(녹색연합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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