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5)

  • 입력 1999년 1월 28일 18시 41분


우리는 말을 끊었다. 그는 설렁탕을 그릇째 받들고 머리를 숙여 천천히 불어 가면서 국물을 마셨다. 나도 말없이 떠넣는다. 국 그릇을 꼬옥 잡고 있는 봉한의 손가락들은 새의 발처럼 보인다. 그 손톱 끝에 가늘게 끼인 때가 선명하다.

지쳤어요. 이 도시가 모두 소모시킨 거요.

예전과는 다른 일감이 있어야겠지. 기념하는 건 그만하고….

형님은 자기 노선이 있소?

노선?

그러나 나는 웃지 않는다. 희망은 있는 걸까. 만약 그런 게 남아 있다면 거기가 나의 노선이 될텐데.

우선 생활을 잘해라. 너는 이제 익명이야. 아무도 아니라구. 지명수배두 옛날에 끝났잖아.

모두들 거짓말만 하고….

나는 그가 고향에 돌아와서도 다른 이들과 불편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점심은 끝났다. 나는 그와 곧 헤어지고 싶어졌다.

자 이제 일어서야겠다. 가 볼 데가 있거든.

어디로 가시게요?

그냥… 건이 만나면 못보고 간다고 전해라.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를지두 모르겠다.

봉한은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나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차도 쪽으로 걸어 나갔다. 택시에 오르는 나에게 그가 외쳤다.

건강 조심하쇼.

내가 윤희를 찾아갔던 날 나는 사하촌의 상가에 끼어있는 한옥 여관에서 묵었다. 창호지로 바른 미닫이를 열면 툇마루가 달렸고 마루에서 내려 몇발짝을 떼면 계곡이었다. 제법 경사가 가풀막져서 물 소리가 요란했다. 처음에 자리에 누우니 귀청이 멍멍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벌써 피해 다닌 지 다섯 달이 되었다. 서울은 원래 내 활동 근거지였고 친구들도 많아서 숨어 다니기에 편리했지만 같은 이유로 위험은 더 많았다. 봉한은 두 번째로 은신처를 바꾸었는데 수사 당국에서도 그를 첫 번째 수배자로 지목했기 때문에 당시가 가장 위험한 때였다. 미아리에 큰 길과 골목의 양쪽에 출입구가 있는 당구장에서 약속을 했다. 제법 사람의 출입이 잦은 오후 서너 시 경이었다. 나는 꼭 한 자리 비어있던 당구대에서 혼자 당구를 치는 척하면서도 입구를 연신 살폈다. 언제 나타났는지 내가 차지한 당구대의 바로 뒤 점수판 아래 긴 의자에 권형이가 앉아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당구채를 잡더니 자기 차례이기나 한 듯이 빨간 공을 때렸다.

형은 못나왔어요. 제가 말렸습니다. 사진이 사방에 붙어서요.

동향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나타나선 안될거야.

물론이죠. 몇몇이 의논 중이에요. 아마 떠날 겁니다.

떠나다니….

어떻게든 여기선 안되겠어요.

우리는 그 다음부터 당구에 열중했다. 두 게임 다 내가 이겼다. 긴장해서 그랬는지 보통 때보다 더 잘 맞았다. 당구장 계단을 내려오는데 권형이가 눈짓을 했다.

형님, 화장실 안갈래요?

나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화장실에 들어갔고 거울을 마주보며 나란히 서서 오줌을 누었다. 그가 쪽지를 내밀어 주었다.

이거 확인하고 기억해 두세요. 나중에 없애버리는 것두 잊지마시고.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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