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강원도 산골의 한 사법피해자로부터 격렬한 비난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어쩌다 송사에 휘말려 불려다니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피해를 보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원천적 책임이 사람을 잘못 가르쳐 내보낸 법학교수에게 있음을 깨닫게 됐다며 통박하는 내용이었다.
▼ 사법불신은 국민불행 ▼
우리 사회 부조리와 모순의 큰 몫이 거슬러 올라가면 법과 그 종사자에게 연루돼 있음이 지적된 지는 이미 오래다. 지난 반세기의 우리 헌정사는 정치적 외풍과 내부비리를 극복하지 못한 법 엘리트들이 스스로 법적 안정성을 해치고 결과적으로 국론을 분열시킨 무수한 전례를 가지고 있다. 법없이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고 보면 한 나라에서 법종사자가 불신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불행이기 이전에 국민 전체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심재륜(沈在淪)대구고검장이 대전법조비리와 관련하여 그동안의 검찰의 오욕에 대해 국민 앞에 사죄하고 검찰 수뇌부의 퇴진을 촉구한 성명서를 냄으로써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파동을 계기로 검찰을 위시한 사법의 개혁과 민주화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시대의 과제로 떠올랐다.
온갖 오욕으로 점철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나라 법의 역사에서 검찰의 몫이 크다는 점은 더이상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그동안 우리사회를 괴롭힌 문제는 광의로는 ‘법의 문제’였으되 협의로는 ‘검찰의 문제’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검찰 수사의 공정성,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하기에 충분한 행태들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시절은 물론이고 문민정부 그리고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정치인 편파사정 수사, 국회 529호실사건 수사, 이번 대전 사건 처리 과정 등등에서 검찰 수뇌부가 보여준 모습은 우려의 도를 넘고 있다.
심고검장의 발언 동기와 배경이 무엇이든 그동안 검찰에 대해 수없이 지적돼온 문제를 현직 검찰 고위직이 정면으로 인정하고 국민 앞에 사죄한다는 표현을 쓴데 대해 우선 신선한 충격을 느끼는 국민이 많을 것이다.
검찰 내부에서는 항명으로 규정하고 징계절차에 들어갔으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비리를 외부에 알린 그는 일응 내부비리 고발자이다. 생각해 보면 검찰이 그간 국민의 뜻을 좇지 않고 정치권력의 뜻을 좇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이를 국민 앞에 열어 놓은 그의 폭탄선언을 일방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로 모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잘못이 있다면 그 자신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고검장은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받는 검찰로 태어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고 생각한다.
검찰의 자체 개혁을 위해서도 이제 검찰수뇌부의 사퇴용단은 빠를 수록 좋다. 그러나 검찰수뇌부의 퇴진이 곧 검찰개혁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기본적으로 법조엘리트들은 ‘개혁’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대전법조비리사건이나 이번 검찰‘항명’파동을 통해 우리 사법이 안고 있는 개혁적 과제가 무엇인지는 이제 대중적으로 확인되었다. 우선‘정치검사’‘권력의 시녀’라는 치욕적인 용어가 말해 주고 있는 검찰의 한참 잘못된 관행과 조직생리를 발본색원하고 바로잡는 제도와 의식 개혁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이와 함께 사법권도 입법 행정권과 마찬가지로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기본원칙에 입각하여 법학교육 및 사법의 새 틀을 짜는 개혁을 방치하고서는 국민의 정부는 설 자리가 없다.
▼ 의식-제도 새틀마련을 ▼
검찰의 거듭남을 위해서는 특별검사제나 기소법정주의, 재정신청제도확대, 사인(私人)소추제, 대배심제, 검찰심사위원회 등 그동안 미루어 왔던 제도의 도입을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치검사’ ‘독직판사’라는 오명과 무관하게 묵묵히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적지않은 수의 판검사들, 국민의 인권신장을 위해 재야에서, 시민운동단체에서 노력하는 변호사들이 있다 한들 우리 사회에서 법을 통한 정의 실현의 믿음이 사회성원들 가운데 되살아나지 않으면 우리사회의 미래는 없다.
박은정(이화여대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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