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6)

  • 입력 1999년 1월 29일 18시 55분


내가 먼저 골목을 나섰고 그는 다른 길로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봉한이 어디쯤에 은신하고 있는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사태가 터지기 전의 계엄 막바지에 우리 셋은 주위에 알려지지 않은 몇몇 장소를 돌며 답사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날 마지막 집을 방문 하고나서 우리는 시장 모퉁이에 있는 어느 점집에서 신수를 보았다. 주인은 여자 무당이었는데 우리 셋은 모두 쑥스러워 하면서도 그네의 쌀을 담은 소반 앞에 고분고분 둘러앉았다. 조금은 신비주의적인 데가 있는 수도사 같은 권형이가 점을 보자고 우겼는지도 모른다.

무당은 밥을 먹다 나왔는지 연신 입짓을 하며 이빨을 빨았다. 제일 먼저 나를 보았다. 무당이 느닷없이 새된 목소리로 어린아이 흉내를 냈다. 뭐라고 그랬는지 다 잊어버렸지만 몇마디만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아저씨는 별 탈은 없겠지만 멀리 멀리 돌아다니다가 오랫동안 앓을거야. 꼼짝 못하고 앓고 일어나면 그 뒤부턴 괜찮아.

그 다음이 봉한이 차례였다.

아저씨 까막소 갔었지?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 아버지는 지금도 저승에 못가구 떠돌고 계신다. 아저씨 바로 앞에 피가 보여. 피가 강물 같이 보인다. 이 악업을 면하려거든 깨끗한 옷 한 벌 지어서 아버지 묘 앞에 태워드려.

팔십 년 삼월이었던가 아니면 사월 말 쯤이었나. 피가 강물 같다던 소리는 늘 잊지못했다. 나는 그의 쪽지를 확인했다.

먼 훗날에 저들의 죄상이 밝혀질테지만 시간은 걸릴 겁니다. 우리는 꼭 살아남아서 증언해야 합니다. 급히 서둘지마시고 자중하십시오. 형님 신변에 관하여 연락을 해두었으니 꼭 안정을 찾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계곡의 물 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뒤척였다. 더구나 정월 대보름이라 달은 휘영청 밝아서 창호지 문이 훤했고 뒤란쪽의 퇴창 문으로는 댓잎 그림자가 운치있게 어른거렸다. 그리고 추녀 끝의 풍경소리도. 나는 잠깐 내 보호자가 될 한윤희 선생을 떠올렸다. 얼핏 보아서 그런지 그네의 얼굴을 다시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이튿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절집에 한번 올라가 보았을테고 숲길을 서성이다가…

아, 생각이 난다. 일주문이 서있고 소나무가 무성한 언덕에서 나는 바위에 앉아 땀을 들이고 있었다. 바위 틈 그늘진 곳에는 녹다만 잔설이 얼음이 되어 끼어 있었는데 아래로 부터 서서히 녹아 공동이 되어 맑고 고운 물방울들이 끊임없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누군가 소풍을 나왔는지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언덕 아래 쪽에서 들려왔다. 젊은이들이었는데 둘은 남자고 여자의 목소리가 하나쯤 있는 것 같았다. 한 남자가 노래를 불렀다. 높고 청아한 테너였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고녀. 무심한 그들의 노랫소리가 잊혀지질 않는다.

옛날 영화 같이. 여자가 또랑물이 서로 부딪치는듯한 소리로 웃었다. 그들은 이어서 화음에 맞추어서 노래했다. 목장 길 따라 밤 길 거닐어 고운 님 함께 집에 오는데 목장길 따라 밤 길 거닐어….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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