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8)

  • 입력 1999년 2월 1일 19시 00분


우리는 상점이며 식당이 줄지어 있는 사하촌의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버스 정류장이 보였는데 관광버스가 한 대 서있고 시외버스는 떠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 꽁무니에서 파란 매연을 뿜고, 운전기사도 자리를 비운 빈 택시가 세 대 차례를 지어 섰는게 보였다. 윤희가 말했다.

우린 조기서 차를 타구 어딘가루 갈거예요. 먼저 밥부터 먹구나서 말이죠.

식당 안에는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다.

하루종일 뭐 하셨어요?

그냥 절에두 가보구 낮잠 자구 그랬죠. 퇴근해서 오는 길인가요?

집에 들러서 옷 갈아입구요. 내일은 주말인데 수업이 없어요. 월요일까지는 학교 안나가요.

뭘 가르치세요 학교에서.

그네는 멋적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나는 처음부터 윤희의 다소곳하게 웃는 입 모양이 좋게 보였다.

미술, 그림 그리기요.

근사한데요.

뭐가요?

하고나서 윤희는 파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한 개비 꺼내어 불을 붙였다.

화가의 재능이란 하나두 믿을 게 못돼요. 무수한 재능의 시체 가운데서 우연히 남은 거예요. 이런 시골 학교에 와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어요. 정말 깜짝 놀라도록 훌륭한 소질을 가진 애들이 한 둘씩은 있으니까.

화가가 그런 말을 하면 누가 믿죠?

아아, 나는 아직 아녜요. 앞으로 그렇게 할까 하구 생각 중이죠. 정말 천재적인 애가 하나 있었는데 지난 학기에 학교 그만두고 도시로 나갔대요. 뭐 미용실에 취직한대나. 미술시간마다 화구도 없이 들어오구 그래서 내가 사주기도 했는데, 다른 학과는 성적이 엉망이구요. 집에서 농사를 짓는다는데 언니들 셋이 모두 공장으로 남의 집 살이로 나갔대요.

윤희는 자기 말에 열중할 때 검지 손가락을 권총처럼 세워들고 휘저으며 이야기했다.

하긴 뭐 미술대학 갔다면 다 버려 놨겠지만.

집이 이 근처세요?

나는 궁금하던 점을 물었다. 보호자의 연고지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나에게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네를 잘 아는 이라면 내가 한눈에 부자연스럽게 보일 테니까.

유감스럽게도 서울내기랍니다. 글쎄 거기서 태어나기까지 했으니. 헌데 이번엔 내가 좀 물어봐두 되는 거 아닌가요?

물으시죠.

성함이 아무래두…김, 전우씨가 맞아요?

왜요, 제 이름이 어때서요.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사람의 이름이잖아요.

나는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뻔 했다.

윤형은 어떻게 아세요?

전 그이를 잘은 몰라요. 말씀드릴순 없지만 어딘가에서 꼭 한번 뵈었죠. 미리 알아 두셔야겠지만요 나 운동권 아니예요.

잠수하는 사람 도와주면 나중에 곤란해질지두 모르는데요?

윤희는 예의 그 다소곳한 웃음으로 받았다. 입술 사이로 이가 조금만 보였다가 사라졌다.

광주 비디오 봤어요. 엔 에치 케이 판이요. 여기 신부님한테서 빌려 봤죠.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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