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34)

  • 입력 1999년 2월 7일 19시 29분


윤희의 손짓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주둥이가 말라 붙은채로 쭈그러진 물감 튜브들에도 그네의 손가락 흔적들이 남아 있다. 나는 벽 구석에 채곡채곡 쌓아둔 캔버스들을 책장처럼 들치며 안쪽의 것들을 살핀다. 제일 안쪽에 한 이십 호짜리의 그림을 찾아낸다. 그리고는 비어있던 이젤 위에 얹어 놓았다.

두 사람의 얼굴을 크고 작게 거의 간격이 없이 그려 놓았다. 왼편에 있는 얼굴은 나였다. 내가 그림에서 입고 있는 셔츠는 흰 바탕에 푸른 바둑 무늬가 찍힌 반 소매 남방이었다. 바깥 세상에서의 마지막 여름이었지. 그때에는 모두가 긴 머리를 하고 있어서 그림 속의 내 머리도 길게 자란 뒷머리가 셔츠의 깃 뒤로 삐져나와 있었다. 눈에는 짙은 음영이 칠해져 있고 움푹 파인 볼은 당시의 고뇌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배경은 어두운 빨강이 주조로 깔리고 코발트의 푸른 붓자욱이 세로로 그어져 있어서 음울한 분위기가 더 강조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 얼굴 옆으로 창호지를 바른 격자 창문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위에 회색이 덧칠해지고 윤희는 편지에 쓴 것 처럼 자기 얼굴을 그려 넣고 있었다. 나는 이제 새삼스레 근년의 그네의 모습을 바라본다. 윤희는 내 얼굴을 그리던 때와는 달리 훨씬 투박하고 굵은 터치로 색을 덧붙이듯 표현을 해놓았다. 머리는 드문드문 회색이었고 눈은 검은 선이 몇 개 겹쳐 있는 것으로 그 뒤의 표정을 멀리 느끼게 해놓았고 광대뼈는 강조되었다. 뺨에는 여러 겹의 서로 조금씩 다른 물감이 덧칠해져서 그네의 쇄락한 젊음과 인상의 깊이를 동시에 느끼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내가 언제나 좋아했던 저 웃을 듯 말 듯한 입가의 묘한 미소는 입술의 곡선과 볼의 볼륨으로 섬세하게 드러나 있다. 그네는 바라보는 나를 향하여 웃음을 머금고 이윽히 마주보고 있었다. 그래요, 우리 이 모든 나날들과 화해해요. 라고 윤희는 그네의 마지막 편지의 끝 구절을 되뇌고 있는 듯 했다. 서른 두 살의 젊은이와 사십대 중반의 여인은 서로 다른 색깔의 배경을 등지고 나란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순천댁이 청소 도구를 갖다 준 뒤에도 이젤 앞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한기가 느껴질 즈음에야 나는 순천댁이 난로를 피우려면 연탄을 가져가라던 생각이 나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솔길을 내려가 아래채로 내려가니 순천댁이 부엌에서 내 쪽을 내다보며 손짓했다.

연탄 피워 놨응개 요놈 갖구가요.

연탄 두 개를 넣을 수 있는 양철 바케츠와 집게를 저어 보이면서 순천댁은 말했다.

우선 두 개로 불 피워 놓고 군불 때고 허면 따땃하겠고만이라. 연탄은 우리 애보러 날라 주라고 헐팅께.

아닙니다. 제가 이걸루 한 두장씩 나르지요.

저녁은 내레와 묵소 잉.

불 지핀 연탄을 바케츠에 담고 집게에 새 탄 하나를 집어들고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이번에는 양철통에 한꺼번에 네 개를 겹쳐 담고 올라갔다. 그런 식으로 연탄 열 두어 장을 날라다가 아궁이 앞 엇걸이 칸에 쌓아 두었다. 아래에 불 피운 연탄 두 장을 먼저 넣고 새 탄을 두 장 얹었다. 나머지 칸은 둥글게 비어 있었지만 네 장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불이 붙었는지 실내가 훈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싱크대에서 살림 도구들을 꺼내어 점검해 보았다. 아니 그보다는 윤희의 흔적을 살피고 있었을 것이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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