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캠퍼스의 존 마버거 전총장은 이 학교 물리학과 정창기(鄭昌機·44)교수를 이렇게 평가한다.
스토니브룩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물리학의 최고 명문이다.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 벤자민리(이휘소)박사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시엔양박사가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정창기교수.
롱아일랜드는 이름 그대로 너무나 긴 섬이었다. 케네디공항에서 내려 롱아일랜드의 동쪽으로 2시간 가량을 달려서야 스토니브룩 캠퍼스에 도착했다. 뒷머리를 네갈래로 땋아 구슬을 꿴 헤어스타일에 넥타이 대신 네커치프를 맨 우람한 체격의 사나이가 손을 내밀었다.
“고생많았어요. 워낙 외진 곳이라서….”
결코 교수같아 보이지 않는 그가 세계 입자물리학계의 ‘떠오르는 샛별’ 정창기교수다.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뉴욕타임즈에서 지난해 3회에 걸쳐 대서특필한 인물.
그는 갑작스럽게 유명해졌다. 지난해 6월 미국과 일본의 과학자 1백20명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 다카야마(高山)에서 열린 ‘뉴트리노98’국제학회에서 “우주탄생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뉴트리노(중성미자·中性微子)가 질량을 갖고 있다는 구체적인 간접증거를 발견했다”고 발표한 것. 세계 과학계가 떠들썩했다.
정교수팀은 96년 다카야마의 한 탄광 갱내에 5만t의 물을 채우고 우주로부터 매초 수조개씩 날아오는 뉴트리노가지구의원자와충돌하면서 내는 섬광을 탐지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했다. 그리고 축적된 데이터를 분석했더니 뉴트리노가 진동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는 것. 과학자들은 진동하는 모든 입자는 질량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정교수는 당시 50명으로 구성된 미국측 과학자들 가운데 10명의 팀을 모아 가장 먼저 실험에 참여했다.
세계 과학계는 이번 발견의 의미가 워낙 크기 때문에 실험에 가장 많이 기여한 사람이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노벨상이요. 영광스럽죠.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벨상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노벨상은 노력이나 운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죠. 젊을 때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수상할 확률이 높습니다. 영어회화에 능통하고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사교적인 성격까지 갖춰야 세계석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지 않겠어요.”
한국을 떠난 지 20년. 콧소리가 약간 섞여 한국어가 서투른 것 처럼 들린다. 대학에서도 그는 다소 ‘엉뚱한 교수’로 통한다. 외모와 강의가 모두 그렇다. ‘실험에 강하다’는 평을 받으면서도 전공강의는 물론 일반 교양강좌까지 열심이다. 8년째 계속해온 ‘음향과 색상, 그리고 비전’이라는 제목의 교양강의는 스토니브룩의 히트강좌다.
79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물리학 분야에서 최고가 아닌 인디애나대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부전공으로 음악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죠. 지도교수가 12학점 가운데 3학점은 음악을 들어도 된다고 선뜻 허락해서 입학했다”는 것이 인디애나대 입학사유.
자신의 개성을 재미로 발전시키면 생활이 더없이 윤택해지고 충만해진다는 게 그의 신조다.
네갈래로 땋아 내려뜨린 뒷머리. 별다른 사연이 없다.
“대학원 시절 문득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라 머리를 땋았죠. 요즘엔 나이가 들어 그만두고 싶지만 집사람과 아이들이 뒷머리 손질하는 데 재미를 붙였기 때문에 계속하고 있죠. 별 상관없잖아요.”
올해 그의 목표는 지난해 실험결과를 다시 증명하는 것이다.이름하여 ‘K2K프로젝트’. 가속기 안에서 만든 중성자빔을 일본 쓰쿠바의 고에너지가속기연구소(KEK)로부터 가미오카 슈퍼카미오칸데 검출기까지 땅밑으로 2백50㎞를 쏘아 보냄으로써 장거리 중성미자의 진동 여부와 질량 유무를 최종 확인하자는 것이다.
그는 3월부터 가동되는 이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지난번엔 미국과학자들을 설득해 참여시킨 다음 뒤로 물러났지만 이번 실험에선 미국측의 대표격인 대변인을 맡게 됐죠.”
실험에 참여한 미국 과학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일본측에 전달하는 것이 그의 역할. K2K라는 이름도 그가 지었다.
〈스토니브룩〓정영태기자〉ytceong@donga.com
▼프로필
▽55년 대구에서 2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서울중 서울고 서울대까지 ‘서울’ 들어가는 학교만 다님
▽서울대 물리학과 재학시절 산악반 활동
▽79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80년 미국으로 유학
▽86년 인디애나대에서 고에너지물리학 실험으로 박사학위 취득하고 90년까지 스탠포드대 선형가속기센터에서 연구원으로 근무
▽90년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조교수
▽96년 스토니브룩 부교수
▽96년 일본 가미오카 광산의 중성미자 검출실험에 미국측 과학자로 맨 먼저 합류
▽현재 미국과 일본이 함께 추진하는 K2K프로젝트 미국측 대변인
▽전자우편 alpinist@sbhep.physics.sunysb.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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