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다시 불붙은 漢字병용 논쟁

  • 입력 1999년 2월 10일 18시 59분


한동안 뜸했던 한자병용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문화관광부장관이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공문서와 도로표지판에 한자를 병용하겠다고 밝힌 것이 기폭제가 됐다. 한글 단체들은 즉각 반대집회를 여는 등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고 한자병용을 주장해온 다른 어문단체들은 환영의 뜻과 함께 한자교육 강화 등 새로운 주문까지 내놓고 있다. 이번 발표는 정부가 사실상 한글전용정책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앞으로 추진과정에서 찬반논쟁은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한글전용과 한자병용 또는 국한문혼용을 둘러싼 논쟁은 지난 수십년간 줄기차게 이어져온 해묵은 과제다. 그래서 문화부가 왜 이 시점에서 특별한 계기도 없이 한자병용 문제를 일방적으로 제기하고 나왔는지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차피 결론 도출이 어려운 문제를 놓고 또 다시 줄다리기를 벌이는 것은 국력낭비밖에 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다고 최근 젊은 세대가 한자를 몰라 겪는 문화갈등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음을 감안할 때 문제제기 자체를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 나라는 중국 일본과 함께 대표적인 한자문화권 국가다. 그럼에도 한글세대들이 크게 늘면서 다른 한자문화권과의 인적 물적 교류에 상당한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중국어나 일본어를 배우려면 한자공부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한자문화권 국가들이 세계시장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이 갈수록 커지는 추세를 볼 때 국가경쟁력과도 관련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국어생활의 편의성 차원에서도 한자병용은 필요성을 지닌다. 한글세대가 한자가 섞인 글을 제대로 못읽는 데 따른 지식전달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문화부의 이번 발표는 이같은 문제 제기의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추진방식과 절차에 즉흥성과 미숙함을 드러냈다. 그 흔한 공청회 한번 거치지 않고 불쑥 한자병용 정책을 꺼낸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한자병용 문제는 어문정책의 틀을 바꾸는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이다. 일차적으로 정부 공문서와 도로표지판에만 해당된다고 하지만 문화부는 불쑥 병용방침을 밝힐 게 아니라 한자교육과 어문정책 전반에 걸친 세부계획을 국민앞에 함께 내놓았어야 했다.

한자병용 논쟁은 그 성격상 찬반양론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가령 한자병용을 채택할 경우 당장 컴퓨터를 다룰 때 한글을 한자로 변환하는 데 따른 시간소모 문제가 발생한다. 정부는 이 문제에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한자병용문제는 관광정책이 아닌 장기적인 어문정책 차원에서 충분한 논의와 여론수렴 절차를 거치는 것이 옳다. 급할 이유가 없다.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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