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나서 막내네가 한다는 전통 찻집 토담에 내려가 모과차 한 잔을 마시면서 이제는 서른이 넘었다는 예전의 토끼 소년과 낯을 익혔다. 윤희와 나는 교감 선생네 막내를 읍내에 심부름도 보내고 용돈도 주고 하면서 귀여워 했다. 앞니 두 개가 좀 튀어나와 보이고 눈이 동그래서 산토끼같다고 윤희가 놀리곤 했던 것이다. 왜 언제나 아이적에 보았던 인물을 어른이 되어 만나면 누구나 실망하게 되는지. 미래가 확정되지 않은 데서 오는 욕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전혀 담기지 않은 아이의 영리함이며 순진함이며가 그야말로 덧없이 사라지고, 성인이 되면서 어느 결에 좀 피로한 듯한 교활함이 살갗에 실리는 것이다. 토끼는 전혀 수줍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경계하는 듯, 또는 중늙은이로 돌아온 나를 약간 냉소하는 듯이 보였다. 그는 내가 갈뫼의 변화가 서운하다는 말을 하자 단호하게―현실을 몰라서 그러지라, 개발이 더 되야 씁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아내인 순천댁의 막내 며느리는 읍내에서 학업을 그치고 도시에는 못나갔지만, 이를테면 광주 나들이가 잦은 아낙네로 보였다. 그들은 나를 아저씨라고 불러서 그나마 저희 부모들과의 오랜 관계는 인정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나오면서 담배 한 갑을 샀다.
담배를 뜯고 한 개비 뽑아서 물어 본다. 저 안에서 눈 오는 날, 시멘트 벽에는 성에가 녹아 물방울이 맺히고 마루의 냉기가 무릎으로 스며들 때 가끔 따끈하게 데운 정종 대포 한 잔이 생각났었지. 야간 근무하러 들어온 담당이 머리가 갑자기 돌아서 그것 한 잔을 식구통으로 슬쩍 들여밀어 주는 상상을 했다. 변소에 들어가 쇠창살이 가로막은 창문으로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늘을 보면 내 입김이 마치 담배 연기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갔다. 그런 날에 정종 대포 한 잔과 담배 한 대가 있었다면.
담배를 입에 물고 생연기 때문에 한쪽 눈을 찡그리고서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 안에서 낯익은 물건이 나왔다. 요즈음은 사회로부터 납품을 받기 때문에 디자인이나 그림이 세련된 연하장을 교무과를 통해 구입할 수 있지만, 그 전에는 인쇄와 지질이 조잡한 연하장을 일괄 구입해 쓸 수밖에 없었다. 소나무와 학이 그려진 연하장인데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검거된 지 얼마 안돼서 구치소에서 보냈던 게 분명했다. 반으로 접힌 카드를 열었다. 서른 두 살의 내가 거기에 변색된 볼펜 글씨로 정지되어 있었다.
윤희에게
처음 여기 오던 밤에 나는 뼁끼통 위에 올라서서 먼 어둠 속 허공에 몇 점씩 빛나는 별을 보았소. 별인 줄 알았다가 산동네 가난한 창에서 보내는 불빛임을 이튿날에사 알아 보았소. 초저녁에는 산허리에 불빛이 가득하더니 밤이 깊고 새벽이 가까울수록 한 점 두 점 사라져 저만큼 하나, 다시 저어만큼 하나씩. 그제사 창이 다시 별이 되는 연유를 새겨 봅니다. 상기도 잠들지 못한 마음 별이 되는 지금, 내 것도 저기서는 별이 되겠지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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