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날에도 2천5백여만명의 민족 대이동이 있었다. 말이 2천5백만명이지 이만한 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 좁은 국토에서 요리조리 이동을 하여 찾아갈 곳을 찾아갔는지 그 얼개그림을 그려볼 수 조차 없다.
이 모습을 누가 인공위성같은 것으로 총체적으로 촬영을 할 수 있다면 아프리카 세렌게티 평원 흰 개미 군단의 이동보다도 더 장엄한 광경이 될 것이다.
★初心 회복위한 고향길★
이제 그 2천5백만명이 거짓말처럼 감쪽같이 이전에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와 있다. 고향에서 받았던 따뜻한 환대, 친척들과 나누었던 정담들의 여운이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고향에서 오히려 더욱 마음 아픈 사연을 안고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하였던가. 여우도 죽을 때가 되면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로 향한다지 않는가. 간사하기로 유명한 여우조차도 고향 그리는 마음을 끝내 버릴 수 없다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들이야…. 우리가 명절을 맞아 고향을 다녀오는 이유도 바로 이 초심, 처음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그 길이 즐거운 여행이 되든, 쓰라린 여행이 되든 우리의 뿌리를 더듬어보고, 그 뿌리에서 뻗어나온 가지들과 열매들을 어루만지며 확인해보고, 우리가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 되짚어보기 위해 고향길 위에 섰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길 위에 설 수조차 없는 실향민들의 서러움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 아닌가.
고향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무엇을 들었는가. 정지용 시인이 ‘향수’라는 시에서 노래한 그 얼룩빼기 황소의 게으른 울음소리는 듣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대신 경제난국으로 피폐해진 고향모습을 보고 불만과 탄식, 분노의 음성을 주로 들었을 것이다. 지역감정이라고 억울하게 매도당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변명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소리들은 한결같이 나라를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시대에 누가 나만 잘 살기를, 우리 지방만 잘 되기를 바랄 것인가.
이제 우리 국민은 우리나라만 잘 살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 백성들이 아닌가.
러시아가 잘못 되고 브라질이 잘못 되어도 우리나라가 함께 잘못될 수 있다는 ‘글로벌’ 인식을 지니게 된 백성들이 아닌가 말이다. 브라질이 잘못되어도 우리나라가 잘못되는 판인데 경상도가 잘못되어도 전라도는 잘 되고 전라도가 잘못되어도 경상도는 잘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 국민 중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고향에서의 그 모든 소리들은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가 공동운명체라는 절규들이 아니었던가. 공동운명체로서의 냉철한 인식, 이것이 이번 명절에 우리가 얻은 초심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이 초심이야말로 이 난국을 거국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겠는가.
더 나아가 북한과의 통일도 이룰 수 있는, 그리하여 실향민이라는 말을 이땅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겠는가.
★공동운명체 깨달음★
지금이야말로 많은 사람이 한 목소리로 외칠 때 쇠도 녹인다는, 중구삭금(衆口?金)의 단결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이다. 그런 구심점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은 정치이고, 그런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서로 자기 것을 챙기려고 하기보다 자기 것을 오히려 부인(否認)하는 희생이 따라야 하는 법이다.
이번 명절에 초심을 회복한 우리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마음과 힘을 합하는 한, 그 어떤 것도 희망의 태양을 개기일식으로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고향에 다녀와서도 별 생각없이 그저 되는 대로 살아간다면 그런 사람은 비록 선지자가 아니라도 고향이 다시는 환영해 주지 않으리.
조성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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