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44)

  • 입력 1999년 2월 20일 20시 52분


고서점에서 일본책이나 영문판 페이퍼백을 사 모아 오시곤 했는데 우리는 그래서 아버지가 술 잡수시는 일만 빼고는 우리 보다 훨씬 아는 게 많을 거라구 자랑스럽게 생각하군 했어요. 아버지는 추위나 더위를 별로 타시질 않았죠. 겨울에도 내의를 챙겨 입지 않아서 홑 바지 차림이었구요, 여름에는 아무리 더운 날에도 행감치고 방안에 조용히 앉아서 부채를 슬슬 부치며 하루종일 앉아 계셨어요. 아버지의 앉은 자세는 꼿꼿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는데 언제나 한 자리에 앉으면 움직일줄을 몰랐어요. 아버지의 발은 매우 괴상하고 흉했지요. 오른 발은 발가락이 세 개 뿐이고 왼 발도 새끼 발가락이 없어요. 게다가 양쪽 복사뼈는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불거져 나와있죠. 정희랑 나는 어릴적에 아버지의 복사뼈 굳은 살을 손톱으로 꼬집기도 하고 쥐어 뜯어 보기도 하면서 킬킬거리곤 했어요.

그런 얘기를 하니까 당신은 그 때 조용히 말참견을 했지요. 그건 아버지가 험한 시절에 여러 해 동안 감옥살이를 했기 때문일 거라구요.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한 겨울을 지내 보면 안다구요.

그 무렵에는 왜 그렇게 반공 행사가 많았는지. 학교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반공 포스터를 그려 와라, 멸공에 대한 글짓기를 해 와라, 반공 웅변대회를 준비해라, 했지요. 중학교 일학년 때인데 포스터 숙제를 하구 있었어요. 나는 정말 그림에 대한 칭찬은 국민학교 때부터 늘 들어왔지만 미술반엔 한번두 못들었어요. 엄마의 반대 때문에요. 고 삼에 가서야 입시 때문에 데생 익히러 화실에 몇 달 나갔지만요. 하여튼 포스터를 그리는데 고만할 적에야 만화가 제일 익숙하던 때니까 좀 익살스럽게 그렸지요. 위에다 붉은 글씨로 ‘쳐부시자 공산당!’ 이라고 쓰고 근육이 우람한 국군 아저씨와 국민인 남녀 어른 셋이서 어깨동무를 하고 발 아래 뿔 달리고 털이 숭숭 나고 송곳 이빨이 나오고 몸둥이는 새빨간 도깨비를 짓밟고 있는 그림이지요. 한참동안 도깨비의 몸에 새빨간 에노그를 빈틈없이 그려 넣고 있는데 어느새 아버지가 등 뒤에서 넘겨다 보는 거예요.

너 뭘하니?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했어요.

반공 포스터 그려 오래요.

응 그래… 그 밑에 있는 뿔 난 도깨비는 뭐냐?

이건 공산당이요.

정말 흉칙하구나.

빨갱이니까요.

그때는 아버지두 더 이상 아무 말씀이 없으셨어요. 일은 나중에 벌어졌지요. 내 그림이 학교에서 전국 대회에 보내는 열 점의 포스터에 뽑혔구요 나중에 우수상을 받게 되었거든요. 금박으로 장식된 상장과 부상으로 색깔이 수십가지나 되는 고급 수채화 물감과 스케치 북을 받았거든요. 나는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마루에 앉아있는 아버지에게 들뜬 목소리로 외쳤어요.

아버지 나 상 받았어요.

아버지는 그 때에 술에 취해 있었는데 내가 내민 상장을 받아 보더니 참으로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죠. 그러고는 단숨에 절반으로 죽 찢었어요. 다시 두 장을 겹쳐서 찢고 이어서 발기발기 찢어서는 마당으로 뿌려 버렸어요. 내가 가져온 스케치 북이며 물감도 마당 멀리 던져 버렸구요. 스케치 북은 날아가 수도깐에 떨어져 물에 잠겨 버렸고 물감은 낱낱히 흩어져 마당에 좍 깔렸지요. 나는 너무 놀라고 어이가 없어서 마루 아래 주저앉아서 울음을 터뜨렸어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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