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세기말. 우리가 기댈 원초적 고향은 모성(母性)이 아닐런지.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어머니의 재발견을 그린 한국영화 ‘마요네즈’, 모녀의 애증을 그린 연극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격동의 한국사 속에서 온몸으로 ‘내 자식’을 지켜온 연극 ‘어머니’(27일 개막) 등 최근 어머니를 주제로 한 문화상품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이름하여 ‘어머니 신드롬’.
그런데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닌 모양이다. 10일 개막, 21일(현지시각)까지 계속된 독일 베를린 영화제에서 가장 관심을 모은 배우는 영화 ‘원 트루 싱(One True Thing)’의 메릴 스트립이었다.
살림을 전문직으로 알고 자식과 남편을 위해 사랑과 희생을 아끼지 않는 평범한 어머니의 일상을 섬세한 내면연기로 표현, 갈채를 받은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동과 서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에게 희망과 안식을 주는 곳은 어머니의 품임을 메릴 스트립은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심사위원 특별상인 ‘베를린 카메라상’을 수상한 그를 영화제 기간 중 베를린 팔레스호텔에서 만났다.
올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인 50살. 단정한 검은색 투피스를 입고 나온 메릴 스트립은 눈가에 약간의 주름이 잡혔을 뿐 여전히 깨끗하고 투명한 피부를 간직하고 있었다.
“가정을 위해 늘 헌신해왔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우리의 어머니 세대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고 싶었습니다.”
‘원 트루 싱’은 안나 퀸들린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커리어 우먼을 꿈꾸는 탓에 살림만 하는 어머니를 ‘우습게’ 보며 살아온 딸이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야말로 자신을 키워온 뿌리였음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리버 와일드’에서 급류를 휘저어가는 강한 여성, ‘아웃 오브 아프리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운명적 사랑을 겪는 여주인공처럼 화려하고 개성이 강한 배역은 아니지만 영혼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의 연기가 스크린을 압도한다.
“몇년전 이 책을 읽었을 때 저는 딸의 정서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딸 역할을 하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막상 영화가 제작됐을 때는 제 나이가 엄마 역에 더 어울리게 됐어요.’
그는 미국 뉴저지에서 약품회사를 경영하는 아버지를 둔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실제 그의 어머니도 공부를 많이 한 편은 아니었지만 딸이 대학공부를 하든, 연기생활을 하든 모든 것을 믿고 밀어주었던 든든한 후원자였다.
이제 메릴 스트립도 조각가인 남편과 네명의 자녀를 둔 주부다. 섬세한 내면연기에서 단연 세계 최고의 배우로 꼽히지만 “일도 가정도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요소”라고 메릴 스트립은 말했다.
“어떻게 두가지를 다하는 것이 가능하느냐구요? 내게 주어지는 수많은 과제를 조정하는 것도 정말 재미있는 일인 걸요.”
그것은 마치 유엔같은 국제기구처럼 하루에도 수백가지 일에 대해 협상을 벌여야 하는 작업이라는 것. 우선 남편과 상의해서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결정한다. 못하는 일은 빨리,깨끗이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법. 그 다음 매일매일 ‘삶의 대본’을 짜서 따라가면 된다는게 메릴 스트립의 인생관리법이다.
아카데미상 후보에 11번이나 올랐으며 그 중 ‘소피의 선택’으로 여우주연상을,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던 메릴 스트립. 그러나 그는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상으로 미국의 한 시민단체로부터 받은 ‘올해의 어머니상’을 꼽았다.
‘원 트루 싱’의 칼 프랭클린 감독은 메릴 스트립에 대해 “복잡다기(複雜多岐)한 성격을 지닌 캐릭터에 누구보다 빠르고 깊숙히 젖어드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녀는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던 평범한 주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고 평했다.
“어떻게 자신이 출연할 작품을 선정하는가”는 질문에 메릴 스트립은 자신의 ‘매부리 코’를 가리켰다.
“나에게 뛰어난 감독과 좋은 시나리오를 찾을 수 있도록 길고도 좋은 코(long nose,good nose)’를 주신 신께 감사드립니다.”
〈베를린〓전승훈기자〉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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