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우리 역사는 꼭 장기 말 쌓는 놀이 같지 않아요? 처음에는 한 개 두 개의 힘을 쌓아 가면서 아슬아슬하게 이제 겨우 다 쌓았다 할 즈음에 무엇인가 거역할 수 없는 힘이 판을 툭 건드리거든요. 그러면 와르르 무너지고, 그 잿더미와 피투성이의 폐허 위에서 다시 한 개 두 개를 쌓아 올립니다. 그런데 모두들 마지막 한계를 미리 알면서도 뛰어넘기는커녕 똑같은 방법으로만 쌓기를 시작하고 붕괴 되기를 되풀이 하지요. 마지막 한계가 무엇일까요.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즉물적 사실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관념이기도 하지요. 그건 분단과 외세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줄기차게 논쟁했던 전위냐 대중이냐 하는 문제로 돌아갔다. 나는 아직 어정쩡 했다. 나는 남수가 확실하게 싸우고 싶다고 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생각이 났다. 그는 나중에 서울에서 나와 여러차례 만났다. 그는 이전보다 훨씬 침착해져 있었다. 나는 그를 공원에서 만났는데 큼직한 짐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우리는 큰 집을 지키고 있는 어느 젊은 부부네 집으로 가서 오붓하게 둘이서 밤을 새우며 회포를 풀었다. 그는 지금 막 작전 중이었다. 그가 속했던 조직은 도시의 각처에서 조직의 객관화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서부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유인물을 각 대학가에 뿌리는 일이었는데 예비 답사를 다녀오던 길이었다. 그의 보따리에서는 롤러와 등사판이 나왔다. 그는 그것들을 가방에 옮겨 넣었다. 남수의 서부 조에서는 작업에 보다 능률적인 마스터 인쇄기를 구하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교회에 아는 전도사가 있어서 그를 통해서 구해 주리라고 약속했다. 남수는 속삭였다.
속이 막 미치게 떨려라우. 다 출발은 다르지만 가는 길은 같응께 별 갈등은 없소. 산에 올라간다치먼 오솔길도 있고 대로도 있고요 가파른 까시밭 길도 있소. 어느 길이 올바른가는 꼭대기에 서 봐야 아는 거요.
최동우와 자주 만나게 될 무렵에 나는 시골 생활을 마감하고 광주로 나왔다. 남수는 내게 조직 가입을 권유했다. 먼저 조원을 만들고 유인물 작업을 통해서 조원을 검증하고 수습 시킨 뒤에 정식으로 가입을 하라는 식이었는데 동우는 반대였다. 우리는 이미 십여명의 학습조로 시작을 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때까지는 아직 강령도 규약도 없었다. 그러나 학습은 매우 진지하고 깊숙하게 진행되어 있었다. 유신 끝 무렵에는 조원이 이십여명이 넘게 불어나 있었다. 물론 처음 시작했던 사람들 다섯 명 외에는 거의가 개별적인 관리에 의해서 접촉했다. 남수네가 먼저 검거되기 시작했다. 나중에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팔십년 오월에 그들이 활동 중이었다면 항쟁은 폭발적으로 발전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이십 일에 광주를 떠났다. 이틀 전에 친구들의 집에 군복들이 들이닥쳐 권총을 들이대고 끌어갔던 터였고 서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새벽에 체포되었다. 최동우와 박석준은 번갈아 나의 상경을 애타게 권유했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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