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파이어니어 7]신세대문화 평론가 김지룡씨

  • 입력 1999년 3월 2일 19시 28분


‘실패했을 때는 리셋(reset)버튼을 눌러라’.

컴퓨터 게임을 할 때 갑자기 다운되거나 잘못된 길에 들어섰을 때 누르게 되는 ‘리셋 버튼’. 인생도 컴퓨터 오락처럼 리셋 버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지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문화경제 평론가’이자 ‘신세대문화 평론가’인 김지룡씨(35).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나는 일본 문화가 재미있다’와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 성공한다’(이상 명진출판)의 저자이자 21세기 문화산업의 주역을 꿈꾸는 ‘문화 게릴라’다.

▼리셋 인생론

그는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리셋버튼을 눌러왔다. 고등학교 자퇴, 검정고시로 서울대 경영학과 입학, 4년만에 직장을 때려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경영학 공부. 그러나 결국 그는 어릴적부터 미치도록 좋아했던 전자오락과 만화, 애니메이션에서 자기 길을 찾았다.

서울 강서구 염창동 13평짜리 연립주택. 그의 생활공간이자 작업실이다. 화려한 가구는 없지만 컴퓨터 4대, 비디오 2대, 소니의 ‘플레이 스테이션’과 닌텐도의 ‘수퍼 패미콤’ 게임기, 일본 애니메이션과 영화 비디오 2백여편, 만화책 4백여권 등 즐기기 위한 도구는 가득차 있다.

일본 유학시절 한 시간에 1백80엔을 내면 자유롭게 만화를 볼 수 있는 ‘만화 다방’에서 커피 한 잔으로 목을 축이며 8시간 동안 만화를 보기도 하고 6박7일간 2∼3시간의 ‘쪽잠’을 자며 전자 게임을 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전자 오락 등 일본 대중문화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덧 일본이라는 나라가 보이기 시작했다.

▼재미란 무엇인가

“오타쿠(オタク·폐쇄적인 공간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사람)요? 저는 솔직히 마니아는 아니예요. 마니아는 어느 한 분야에 집중하거든요. 그러나 저는 만화든 전자오락이든 애니메이션이든 재미있는 거라면 뭐든지 좋아하죠.”

대중문화에 있어 그의 유일한 평가기준은 ‘재미’다. 일본문화에 대해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는 이야기가 무성할 때 그는 ‘재미있다’를 들고 나왔다.

그의 일본 문화평론이 다른 책과 달랐던 것은 대중이 열광하고 재미있어 하는 대중문화를 통해 일본사회 전체의 정치적, 경제적, 심리적 구조를 설명한 점이다.

일본의 대중문화 시장은 우리보다 20∼30배나 넓은 시장. 일본 유학시절부터 그는 우리의 만화와 게임을 들고 다니며 일본에 팔 방법을 궁리하고 다녔다. 일본에서 붐을 이룬 다마고치나 스티커 사진기 같은 것은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힘든 일상생활에 찌든 대중들의 정서를 살짝 건드려준 것 뿐이었다.

“문화에 있어 첨단장비와 기술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일문화 역수출을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일본 사회의 정서를 읽어야 합니다.”

그는 최근 만화가와 스토리작가 등 4명과 함께 ‘미스터 키치’라는 만화 공동창작 집단을 만들었다. 5월에는 만화 ‘아일랜드’(5권) 출간을 계기로 일본에 본격 진출할 계획. “이제 만화도 영화처럼 스토리와 그림 등을 여러사람이 공동기획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미스터 키치가 만화를 기반으로 대중소설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기 등 다양한 장르를 개척하는 ‘21세기형 문화진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칼 뒤에 숨어라

그는 일본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할 때 연수생으로 만났던 7살 연하의 아내와 7개월된 딸과 함께 산다. 돈은 적게 벌지만 대신 적게 쓰면 된다. 냉장고는 없어도 비디오는 2대, 컴퓨터는 4대다. 자신이 좋아하는 곳에만 돈을 쓴다.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동물)’. 그는 21세기의 신세대 인간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누구나 똑같은 평균적 모습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과거의 교육제도 였다면 창의적인 지식산업이 주가 되는 다음 세기에는 저마다의 놀이가 밥벌이의 수단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 그는 “소년이여 야망을 버리라”고 말한다. 대신 “우리는 이세상에 놀러왔다”고 당당히 외친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저마다 자신만의 ‘칼’을 갈아야하는 시대. 일본에 가면 지금이라도 통역을 하거나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서 등짐을 지면서도 살 수 있는 그에게 있어 칼은 일본어다. 그러나 그 칼은 생계의 최소한의 수단일 뿐 출세하겠다는 헛된 욕심은 없다. 대신 칼뒤에 숨어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를 즐긴다.

“야망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20대들이 앞으로 살아갈 시대는 야망을 품은 만큼 콤플렉스만 남을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될 것이다. 왜? 야망이란 것은 무한성장을 추구했던 지난 시대의 가치기준이기 때문이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

▽김지룡은 누구

1964년 인천에서 3녀1남 중 막내 외아들로 출생. 초등학교 시절부터 50원에 ‘갤러그’를 4시간동안 할 정도로 전자오락에 타고난 재질을 보임. 인천 주안고등학교 3학년 시절 ‘학교 생활이 너무도 싫어서’ 한달간 무단 결석한 죄로 퇴학. 83년 검정고시로 서울대 경영학과 입학. 88년 개발리스에 입사해 부산지점에서 4년간 근무. 그러다 ‘제멋대로 살고 싶어서’ 92년 일본으로 건너감. 통역 등 닥치는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6년간 게이오대 경영학과에서 공부.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 중 지난해 5월 귀국.

△혈액형 O형 △키 170㎝ △몸무게 73㎏ △가장 감명깊은 애니매이션 ‘기동전사 건담’△애창곡 터보의 ‘러브 이즈’(술 취해 제정신이 아닐 때는 랩도 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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