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최규철/어깨의 힘을 빼자

  • 입력 1999년 3월 2일 19시 28분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미대통령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섹스스캔들에 시달리느라 미국민은 지난 1년동안 녹초가 됐다. 연일 되풀이되는 공화당의 대통령탄핵론이나 민주당의 반대론이나 국민을 피곤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또 1년내내 각종 언론매체가 쏟아붓는 ‘모니카게이트’보도에 그만 질리고 말았다. 지난달 미상원에서 탄핵안이 부결됐을 때 정작 환호한 것은 백악관이 아니다. 시민들이었다.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지점에 온 것이 정말 기쁘다.” 미국각지 시민들의 가장 많았던 반응이었다.

▼ 美국민들 政爭에 신물 ▼

모니카게이트는 당초 대통령선거에서는 패배했으나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공격과 민주당의 저지가 맞서면서 확대됐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정치인과 시민, 그리고 언론과 시민 사이에서도 보이지않는 싸움이 벌어졌다. 이점이 중요한 대목이다.

왜 미국민은 클린턴대통령의 부도덕성을 인정하면서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것에는 반대했는가. 왜 미국민은 1년 이상 계속된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자신의 의견을 바꾸지 않았는가. 최근 밝혀진 사실이지만 미국민은 섹스스캔들이 터진 지 수주일 안에 이미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행동은 부도덕한 짓이지만 그것이 백악관을 떠나야 할 사유는 아니다.” 지난해 1월부터 12월까지 1년동안 미국의 각종 매체가 탄핵여부를 놓고 실시한 여론조사는 모두 1천2백33회. 워터게이트사건이 터진 후 72년 6월부터 74년 12월까지 2년반동안 닉슨대통령의 진퇴여부를 물은 여론조사 3백35회의 3배를 훨씬 넘는 횟수다. 그러나 조사 때마다 나타난 여론의 추세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정치인이나 언론 모두 그 속에 숨은 뜻을 제대로 읽으려 하지 않았다. 유권자들은 정당이나 언론의 설득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는 또한 다가오는 정보화시대의 정치와 언론이 나아갈 길을 예시한 것이다.

미국민이 바라는 것은 △세금감면 △복지확대 △범죄단속 △강한 국방이다. 거창한 계획이나 관념적이고 도덕적인 구호보다 일상생활의 구체적 문제에 더 관심이 많다. 생활정책이 우선이라는 뜻이다. 국민적 욕구는 이러한데도 섹스스캔들을 볼모로 탄핵을 집요하게 추구하다가 미국민을 지치고 피곤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자는 것이다.

미국의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작은정부를 표방해 정부기능의 축소를 지향해왔다. 민주당은 시장경제로 빚어지는 부(富)의 편재(偏在)를 견제해왔다. 그런데 탄핵으로 계속 몰아가는 공화당의 모습은 오히려 정부기능을 확대시키려는 것같은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 공화당이 자체분석한 패인 중 하나다.

▼ 정계-언론의 他山之石 ▼

그러나 근본적으로 유권자들의 실용적 욕구가 정당이나 언론의 되풀이되는 주장이나 비판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견고해졌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 같다. “지금은 신보수시대다. 그러나 이념적인 보수가 아니라 실생활의 보수화를 추구하는 시대다”라는 지적과 딱 맞아떨어진다.

유권자들의 변화뿐만이 아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컴퓨터를 이용한 ‘사이버데모크라시(Cyberdemocracy)’ 또는 ‘일렉트로닉리퍼블릭(Electronic Republic’의 개념은 점차 실용화되고 있다. 유권자들이 선택을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직접민주정치’다. 실제로 60년대 이후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의 23개 주에서는 ‘주민발의’ ‘주민거부권’ 등이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확대되는 추세다. 기존의 대의정치구도를 뒤엎는 ‘낡은 정치’에 대한 유권자혁명이다. 우리에게도 먼 앞날의 일만은 아니다.

모니카게이트가 없으니 우리는 괜찮은가. 절대로 아니다. 미국민이 시달렸던 지난 1년동안 우리도 정치판싸움에 신물이 났다. 정치인들은 더이상 자기의 주장에 국민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언론도 더이상 자기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주입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어깨의 힘을 빼야 한다. 겸손하게 일상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민심은 말없이 떠난다.

최규철 <심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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