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53)

  • 입력 1999년 3월 2일 19시 28분


나는 토요일마다 정신없이 마신다

잔인한 벽 뒤에 감금되어 있는

죄수를 잊지않고

죄수의 나날은 이미 이름을 갖고있지 않다

그래서 그 엇갈리고 내달리는 웅성거림은

바다처럼 그의 주변을 적시지만

그 파도가 무엇인지 축축한 토요일의

파도가 무엇인지를 그는 모른다

우리는 광주 항쟁이 끝나고나서 당시에 나온 투사회보와 각종의 유인물들 그리고 서울에서의 우리 조직의 작전 성과들에 대하여 독회와 총화를 했다. 독회는 경춘 가도 인근의 사설 기도원에서 사흘에 걸쳐서 진행 되었다. 광주사태 수사결과문이 발표 되었고 사회불안 불순 조종자 등 삼백여명의 지명수배자 명단도 나왔다. 명단에는 건이는 물론이고 동우와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행히 석준이는 아직 노출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한국 민중 민주화 투쟁연맹 준비위원회’로 조직 명명을 하고나서 준비위 강령만을 채택했다. 규약은 준비위의 명칭을 벗어버리는 때에 구체화 하기로 하였다. 촛불을 켜들고 자기 비판을 하면서 도피해서 살아남은 것에 대한 자책과 후회로 눈물을 흘렸다. 가을이 되면 본격 가동하기로 결의하고 모임을 끝냈다. 여름이 끝나자마자 석준이는 일본의 작은 아버지에게로 유학을 떠났다. 우리는 처음엔 서운하고 말리고 싶었지만 동우가 오히려 그를 격려했다. 우리는 앞으로 해외로도 줄을 대어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우리 외에도 그런 동아리들은 수없이 많았다. 제일 먼저는 심야에 광주 미 문화원의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들어내고 화염병을 던져 불을 지른 농민운동 현장 친구들이 있었고, 나중에 부산 미 문화원을 항의 방화한 현상이는 그 때 서울과 영남 지역에서 끈질긴 피 작업을 하고있을 즈음이었다. 모두들 광주에서의 무자비한 양민학살을 보고 들었고 그것이 불의 시대였던 팔십년대의 시작이었다. 이전처럼 어중간한 생각이나 행태로는 막강한 폭력을 이겨낼 수가 없고 민중에 의한 권력의 장악은 한 세대가 지나도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모두들 혁명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노동 대중의 힘에 대하여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혁명의 전위를 키워가기 위한 사상 학습으로 치달았다. 급진적인 경향은 절망과 치욕감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었다. 좌경은 남수의 마지막 말처럼 정상에 오르는 여러가지 길 가운데서 가장 험난하고 빠른 지름길이라고 우리는 생각했었다.

7

벌써 새벽녘이었다. 닭 울음 소리가 길게 끌면서 시작 되더니 근처의 닭들이 모두 경쟁이라도 하듯이 목청을 뽑았다. 나는 불을 끄고 누운채로 뒤쪽 들창문이 희부염하게 밝아오는 것을 올려다 보았다. 내 머리맡에는 밥상 위에 그네의 노트가 그대로 쌓여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윤희의 독백이 깨알 같은 글씨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껴서 읽고 싶었다. 나는 살아있는 윤희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그네의 노트에 나와있는 것처럼 집의 개수 공사를 끝낸 날 윤희는 이웃 읍내에서 짐을 싣고 이사를 해왔다. 둘이는 자잘한 살림들이며 화구 등속을 같이 정리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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