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56)

  • 입력 1999년 3월 5일 19시 51분


아침을 먹고나서 읍내에 나가 뭔가 필요한 것들을 사오려고 했지만 막내의 얘기를 듣고나서는 그냥 부근에서 산책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나는 천천히 갈뫼 마을 아랫쪽으로 내려갔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가든이니 찻집이니 하는 데는 인기척이 없었고 동네 개들만 요란하게 짖었다. 전에 사과나무 배나무로 가득찼던 과수원 길이 없어지고 시멘트의 새마을 도로가 생긴 마을 길을 한바퀴 돌아서 이번에는 집 뒤의 야산에 오를 생각으로 오솔길로 되돌아 올라갔다. 세차도 하지않은 흙 투성이의 낡은 검은 색 승용차 한 대가 나를 지나쳐서 위로 올라갔다. 나는 차 속을 힐끔 보면서 그 안에 나를 찾는 이가 타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먼발치로 차에서 내린 사내가 찻집의 나무 계단으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천천히 새마을 도로를 걸어서 토담 찻집 앞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고개만 빼고는 바깥을 내다보던 막내가 나와 얼굴이 마주치자 웃어 보였다. 그는 문을 열고 몸을 반쯤 내밀고는 말했다.

차 한 잔 드시고 올라 가시지라.

나도 그에게 웃어 보이며 계단을 올라갔다. 한지로 바른 벽이며 대나무 바구니 모양의 등갓들이며 투박한 나무 탁자 등속으로 민속 분위기를 내려고 애를 써놓았다. 창은 엉뚱하게 유리의 통창이고 맞은편 창가에 그 사내가 앉아서 들어서는 나를 노려 보았다. 그냥 나를 쳐다보았을테지만 눈매가 그렇게 생겨서 째려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막내가 그를 한 손으로 가리키면서 내게 말했다.

아까 말했지라? 서에서 나오신 분이구먼요.

그가 엉거주춤 일어나 보였다. 나는 목례를 하고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오현우씨죠? 일루 좀 앉으십시다.

막내는 달아나듯 자리를 피해서 카운터 쪽으로 갔다. 나는 형사로 보이는 사내 앞에 앉았다.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

이 근방이 내 담당 구역이라… 직무상 몇가지 물어 볼 말씀이 있어서요.

하면서 그는 점퍼 안 주머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나오신지 인자 한 열흘 되었지요?

한 두 주일 되었소.

가석방이지라?

아니, 만기요. 살면서 감형을 받았으니까.

사내는 빙긋이 웃었다.

그렇겠지요. 하여튼 시방 댁에는 보호관찰 대상자요. 여기 오면서 관할 경찰서에 신고 했습니까?

위법한 사실이 없어서 신고하지 않았소.

명백히 말허자먼 그 자체가 위법입니다. 머 좋아요, 여기 온 목적이 뭡니까?

쉬러 왔어요.

들어보니까 조 윗집이 한윤희씨 소유라던데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나는 그의 질문을 되씹으며 잠깐 생각했다. 글쎄, 그네와 나의 관계는 무엇일까. 나는 대답하기 어려운 순간에는 얼굴을 위로 쳐들며 웃곤 하던 교도소에서의 버릇대로 웃음을 지었다.

처는 아니고… 약혼한 사이라던데요?

그럴 거요.

여기 얼마나 머물 작정이오?

한 열흘, 아니면 보름쯤 있어 볼 생각입니다.

그 후엔 서울로 돌아갈 계획이고… 물론 광주에도 들르겠지요?

아니, 그냥 올라갈 겁니다.

그는 수첩과 볼펜을 다시 안주머니에 집어 넣고는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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